Don Sunpil

거대함(bigness)의 피규어, 진열장, 미술관: 잡종성의 디폴트 값 상태 참조

콘노 유키
2019-04-01

페인팅의 특종성(specificity)은 평면이라는 (어쩌면) 삼차원적인 ‘물질감’을 강조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물감의 색상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치되어, 조각 혹은 오브제의 경우 색을 입으면 그 삼차원적 물질감이 단번에 인식되기 어렵다. 요컨대 페인팅에서 평면의 물질화-모더니즘 페인팅이 그랬듯-의 반대편에 물질감의 페인팅-화(化)라는 축이 존재한다. 그리고 피규어는 후자에 해당된다. 색상이 없는 원형(原型)-넓은 의미의 ‘개러지 킷’(주로 레진재질로 된 도색전의 모형으로 판매되는)에 해당되는-은 공장이나 전문가 손을 거쳐 도색된다. 최종적인 결과물에서 표면적인 코팅은 공간감을 창출한다. 실제로는 색깔도 깊이감도 없는 덩어리가 도색과정을 통해 진짜 피부처럼, 진짜 털처럼, 진짜 강철수트처럼 연출된다. 그런 의미에서 피규어는 페인팅적인 사실성을 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피규어에서 페인팅적 요소인 도색과정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바로 형태가 남는다.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2월 20부터 시작된 작가 돈선필의 끽태점은 그 형태에 대한 이야기를 일차적으로 다루고 있다. 끽태점은 한자로 옮기면 ‘喫態店’인데, 이는 일본어의 ‘喫茶店(깃사텐)’에 착안해서 작가가 만든 말이다. ‘喫茶店’은 ‘끽다점’으로 읽을 수 있는데 다방 혹은 카페를 뜻하는 단어로,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차를 음미하는 가게’이다. 끽다점이 이렇게 해석된다면 끽태점은 ‘형태’를 음미할 수 있다는 뜻인데, 이는 앞서 언급한 피규어의 페인팅-화에 대한 거부의 결과를 통해 제시된다. 전시장 곳곳에 위치한 작가의 작업은 피규어와 나란히 위치되지만 일반적인 피규어가 되는 전단계로 전시된다. 피규어의 전단계란 페인팅 없는, 즉 도색되지 않거나 레진킷 그대로 조립한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특정한 인물이나 동물의 형상을 회화적으로 연출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때문에 끽‘태’점의 태, 즉 형태와 모양새가 조형물에서 더 두드러진다. 여러 캐릭터와 크고 작은 대상, 심지어 기하학적 형태까지 포함해서 하나에 어우러진 오브제는 단색 그대로, 손에 든 붓이나 정교한 도색기술을 거치지 않은 채 시각적으로 그 형태와 모양새를 음미하게 만든다.

그런데 전시공간을 더 넓게, 그리고 자세히 보면 끽태점의 ‘태’가 페인팅이 배제된 ‘형태’만을 의미하지 않는 걸 알 수 있다. 진열장과 진열대에 올려진 여러 대상들은 (흔히 언급될 만한) 저울 위의 고급과 하위문화의 관계뿐만 아니라, (박스의) 보관(boxed)과 (투명한 진열장의) 꺼냄(unboxed), 완성되기 전과 후의 모습, 전체(상)과 파편,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작가의 조형물과 소장품 사이에서 각기 다른 ‘상태’로 나타난다. 앞서 본 피규어 전단계의 조형물은, 이 맥락에서 볼 때 여전히 박스 안에 있거나 갓 꺼낸 ‘상태’에 더 가깝다. 이는 진열장과 전시 공간에 일반적인 피규어와 그것이 들어가 있는/있던 박스의 배치를 통해 더 두드러진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업에서 피규어는 반전된다. 일반적으로 색을 입히는 그 대상은 모양새와 형태자체로 음미될 일이 흔하지 않다. 작가는 이 과정을 페인팅의 기술인 그리기가 아니라 색의 올-오버(all-over)함으로 역행시킨다. 그런데 그 역행단계에서 조형물은 여러 소스들의 혼합체로 나타나면서 원형의 특종성-형태, 모양새-에 잡종성을 인식시켜 보여준다. 각종 제작시기도 형태도 다를 뿐만 아니라 전체(상)가 아닌 파편들로 종합된 조형물은 그의 작업에서 ‘복합적인 덩어리’로서의 원형으로 나타난다.

이 부분은 작가가 2016년에 시청각에서 선보인 개인전 민메이 어택 : 리-리-캐스트에서 고민한 지점과 연결된다. 원래 한옥으로 쓰던 공간에서 화이트 큐브-화의 전이(transition)로서의 관계는 복제(과정)에 따르는 열화와 마찬가지로 원본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물음으로 제기된다. “시기를 거쳐온 시점에서 원본은 과연 얼마나 유효할까?”라는 질문 혹은 (작가의) 문제 의식은 앞서 본 페인팅에서의 물질화와 물질감의 페인팅-화의 매체 특종성에 대한 이야기와 연결되고, 더 나아가 여러 상태로 존재하는 물건들을 덩어리로서 인식하게 만드는 진열장과 연결된다. 작품인 조형물과 진열장은 하나의 덩어리로 존재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 상태가 뒤섞여 있는 걸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관람자가 이번 끽태점에서 마주하는 것들은 여러 상태(들)로 구성된 덩어리로서의 진열장과 조형물이다. 관람자는 원형(原型‧原形)을 본다고 생각했다가 그 원형에 여러 상태가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진열장의 시각적인 투명함과 달리, 어떤 작업은 진열장 내부에 잘 안 보이는 위치에 배치되는데 이는 실제 전시공간에서도 마찬가지다. 작업은 계단을 올라가면서 간신히 볼 수 있고 설치 방법에 따라 관람자와의 거리를 확보하게 되면 공간 안에서 더 뒤쪽에 있거나 구석에 있는 작업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덧붙이자면 아라리오 인 스페이스 자체가 전체 전시공간을 통과하고 제일 마지막에 위치한다). 이러한 반(反)-투명성은 최근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복합적인 디폴트 값(Default value) 자체에 의한 투명성과 대치된다. 오늘날 미술관은 작품을 전시하고 사람들이 작품을 보는 공간에 그치지 않는데, 이는 미술관이란 개념을 상실하거나 해체하는 방식이 아니라 건물 외관과 크기를 키우고 다양한 프로젝트 및 기획을 통해 내부 확장을 시도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그곳은 시각적으로 예쁜, 어린이를 위한, 식사를 즐길 수 있는, 휴일에 가족과 함께 올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가능한 일종의 거대함(bigness)의 도시와 같이 만사에 열려 있는 공간-도시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런 상태, 말하자면 미술관이 설정하는 성격 자체가 구체적인 기준이 없어진 상태를 투명성이라 할 때, 오늘날 미술관은 일본의 ‘망가깃사(漫画喫茶)’처럼 디폴트 값 자체가 상당히 모호한, 적어도 원형과 거리를 두는 공간이 되었다.

끽다점에서 한자 의미 그대로 차만 마시지 않는 것처럼, 오늘날의 맥락에서 그곳은 더 모호한 상태로 있다. 한국에 피씨방이 있듯이 일본에 가면 ‘만화끽다’, 그러니까 ‘망가깃사’ 줄여서 ‘망키츠(漫喫)’가 있는데 한자의 뜻 그대로 풀면 만화를 즐길 수 있는 끽다점이다. 그런데 망가깃사에서 사람들은 만화도 읽을 수 있고 음료수도 먹을 수 있고, 인터넷 서비스와 게임, 심지어 샤워실이나 수면 공간을 이용할 수도 있다. 저렴한 가격으로 숙소 대신 쓸 수 있는 그 공간에서 ‘끽다’의 디폴트 값은 더더욱 모호하다. 이와 같이 끽다점이, 미술관이, 진열장이, 그리고 피규어가 잡종적인 디폴트 값을 갖게 될 때, 이번 전시는 단순히 ‘형태’에 대한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 어떤 원형(原型‧原形)에 대한 잡종성, 이미 벌어진 ‘그 상태’를 다룬다.

글 콘노유키 / 미술비평‧와우산타이핑클럽


*이 텍스트는 월간 미술세계 Vol. 413(2019년 4월호) ‘INSIDE EXHIBITON’ 코너 pp. 132-133에 소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