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 Sunpil

롤-플레잉 개념 미술, PART 2. 개업 미학

우아름
2019-04-01

2014년 겨울 돈선필 작가를 처음 만났다. 그는 자신을 반지하의 관리자로 소개했다. 작품 이야기를 듣고자 만남을 청했는데, 캘린더에 일정을 기입하던 모습, 파일에서 문서를 꺼내 건네주던 모습이 기억난다. 특별하달 것 없는 일상적인 모습이 기억나는 까닭은, 그 모습이 시각예술작가가 자신을 ‘관리자’로 소개하는 데서 드러나는 간결한 무심함과 제법 어울렸기 때문이다. 겨울이 지나 봄이 되어 나는 그의 초기 작품의 맥락을 짚는 글을 한 편 썼다. 그 시기에 그는 언어와 기호의 왜곡 과정의 물리적 형상화에 관심이 있었다. 조형의 논리가 서사의 논리에 귀속하던 시절이었다.

신장개업

좁다란 계단과 층간 단차를 오르내리며 아라리오 컬렉션을 다 보고 나면, 언더그라운드 인 스페이스의 지하무대가 히든 스테이지처럼 나타난다. 작정하고 개업을 준비한 듯, 작가가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한 끽태점 포스터와 명패가 좁다란 입구 벽면에 걸렸다. 형태를 음미하는 상점이라는 뜻이다. 그것들을 간판 삼아 비밀 던전과 같은 공간으로 입장하면, 원래 소극장이었던 공간의 논리에 따라 계단식 객석 끝 낮은 무대에 좌대와 진열장이 솟아있다. 공간의 어둠을 배경으로, 진열장이 내뿜는 빛이 새삼스럽다. 진열장 안에는 작가가 수집한 피규어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유심히 보면 초기 발표작도 수집 피규어와 구분 없이 뒤섞였음을 알 수 있다. 미발표 초기작 Our Vigor를 구성하고 있던 피규어들은 아예 해체되어 진열장과 좌대 곳곳에 자리 잡았다.

전시는 세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있다. 첫 장면은 중앙무대의 진열장이다, 이 장면은 작가가 지속해 온 취미(hobby)와 수행해 온 본업으로서의 취미(taste)의 경계를 뒤섞어 휘발시켜 버리는 현재의 신기루의 풍경이다. 두 번째 장면은 무대 안쪽 작은 방에서 펼쳐진다. 이전 방식대로 레디메이드 피규어를 ‘쌓아올려’만든 피규어 혼합조각이 자리한다. 이번에는 동료 작가들의 작품 이후 남은 재료를 활용했다. 좌대에 재활용이라는 마크를 달고서야 전시장에 들어 온 과거풍 작법을 지닌 이 작품의 제목은 ‘decoy(미끼)’다. 익숙한 미술-하기로부터 거리두기의 풍경이다. Decoy감상을 마치고 뒤돌아섰을 때 마주하게 되는 My Vigor는 진열장에 해체된 Our Vigor를 구성했던 장면의 일부다. 제목을 힌트삼아 추측해보건대, 미술을 바라보는 위치를 둘러싼 모두의 게임이었던 Our Vigor가 미술에 대한 작가 내면의 게임으로 바뀐 모양이다. 전시의 마지막 장면은 관람을 마치고 나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다양한 스케일의 자화상 조각 설치다. 상자를 덮어쓰고 게임 컨트롤러를 쥔 반신상 앞에, 게임 속 장면인 듯 수평으로 구성된 피규어-풍경-조각이 좌대 대신 개다리를 달고 있다. 얼굴 조각들은 정면이 가려졌다. 앞으로 그가 선보일 작품이 그간의 리서치를 기반으로 한 피규어 혼합 풍경물일 수도, 의외로 아주 전통적으로 보이는 커다란 얼굴 조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롤플레잉-개념미술

전시와 함께 작가는 피규어 TEXT: 원더 페스티벌 리포트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번 전시를 작가의 연구를 중심에 놓은 리서치 기반 전시로 읽어보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본 전시는 피규어의 생산과 소비의 장을 타진해 본 작가가 본업인 미술로 돌아와 자기 자신을 캐릭터 삼아 펼치는 롤플레잉-개념미술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피규어 산업에는 소비자, 원형사, 제작사 등의 여러 역할이 존재한다. 피규어의 형상은 그 역할들 사이에서, 고양되는 환상과 열화되는 공정을 거치는 가운데 최종적으로 획득된 것이다. 이번 전시 또한 다양한 역할의 논리를 따라 형성되었다. 작가는 자기 자신에게 여러 임무를 맡기고 수행했다. 그는 저자로, 그래픽디자이너로, 상품의 제작자로, 작품의 생산자로, SNS 홍보마케터로, 디스플레이어로 분했다. 이 모든 역할을 업자의 정신으로 수행하면서 그가 본격적인 개업미학 플레이를 펼치는 동안, 어느 틈에 갖춰진 전시 논리 속에 물리적인 전시의 몸체를 갖게 된 것이 끽태점인 셈이다. 전시는 돈선필 작가 작업의 시간축을 따라, 또 서로다른 역할들의 플레이를 따라 선회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번 만남에서는 그가 자신을 납품업자라고 언급했던 것이 떠오른다.

우아름 / 제로원 랩&얼룸나이 팀장 · 미술비평


퍼블릭아트 2019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