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 Sunpil

이 웹사이트에 관해: 미술가의 게시판

민구홍 매뉴팩처링
2020-01-12
이 웹사이트의 홈페이지. 매니지먼트의 백엔드에서 돈선필이 등록한 (돈선필의 관심사 또는 작품과 관련한) 아름다운 이미지가 무작위로 화면을 채운다. 참고로 웹 브라우저의 주소 표시줄에 ‘보안 안 됨’이라는 문구가 출력되는 것은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책임이 아니다.

이 웹사이트는 2009년부터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미술가 돈선필을 위한 온라인 게시판이다. 2019년 겨울,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에 자리한 예술 공간 ‘취미가’와 그 언저리에서 돈선필과 무려 이틀 동안 진행한 워크숍 새로운 질서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워크숍에서는 먼저 인터넷과 웹의 약사, 웹을 이루는 기본적인 언어인 HTML, CSS, 자바스크립트의 개념과 작동 방식을 살폈다. 그 뒤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어떤 문제에나 통용될 만한 질문에 따라 돈선필의 관심사와 웹상에서 이루려는 희망 사항을 목록으로 정리하고, 구체화한 뒤 여기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해나갔다. 희망 사항 하나는 취미가 웹사이트처럼 주된 글자체로 노토 세리프를 사용해달라는 것이었다. 워크숍 막바지에 자연스럽게 도달한 결론은 유별나지 않고, 빠르게 구동하는 평범한 (그래서 어딘가 바보스럽기까지 한) 웹사이트였다. 게다가 웹 브라우저에 이미 탑재된 기능을 최대한 이용한.1 여기서 ‘평범한’이 머문 시점은 소셜 미디어가 창궐하는 웹 2.0 이전, 누구나 웹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용하던 시절에 가깝다. 하지만 이는 뉴트로(New-tro) 유행을 위시한 브루탈리즘 웹 디자인(Brutalism Web Design)2을 따르거나 누군가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려는 일이 아닌, (지금은 잠시 잊힌) 웹사이트의 무궁한 가능성과 웹상에서 콘텐츠를 대해야 하는 태도에 가깝다. 이는 사실 돈선필에게 특별히 밝히지 않은, 워크숍의 숨은 의도기도 했다. 그것이 고객의 행복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는 길이라 여긴 까닭이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 어떤 콘텐츠에 어떤 HTML 태그를 어떻게 사용할지 생각하는 것은 유독 즐거운 일이다. 코드에서 이 구절은 애플에서 제작한 과일 이모지 네 조각을 드러낸다. <ol> 또는 <div> 태그 대신 <ul> 태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특정한 순서가 없는 목록인 까닭이다. 이 구절은 문학과 컴퓨터를 사랑하는 누군가에게는 어딘가 신비해 보이는 시(詩)처럼 보일지 모른다.

이 웹사이트의 스타일을 의도적으로 비활성화한 결과. 국가적 규모의 재난으로 웹사이트를 온전히 출력할 수 없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스타일 없이 HTML 요소만으로도 콘텐츠의 구조와 위계가 명확하게 드러나야 한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기술은 대부분 여기에 집중된다.

‘웹사이트는 웹사이트다.’라는 문장에는 어떤 가능성이 존재하기 어렵다. 따라서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회사’로 규정하듯, 웹사이트를 무엇으로 규정하는지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에 따라 콘텐츠에 어떤 HTML 태그를 어떤 방식으로 이용할지가 결정된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제품 신비한 과일을 이루는 코드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무엇인가?”) 미술가의 웹사이트를 단지 작품을 그러모은 포트폴리오로 규정하는 순간, 그리고 거기서 몇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는 순간, 웹사이트를 만드는 일은 미련을 즐거움으로 가장해 끝없이 기존 템플릿의 CSS만 수정하는, 얕지만 넓디넓은 늪에 마땅한 신발도 없이 발을 담그는 꼴이 된다. 게다가 그런 곳에 작품을 내놓는 순간 “작품은 죽어가기 시작한다.” (로럴 슐스트, 내게 웹 사이트는 지식의 강을 흐르는 강이다. 당신은?)

랜디 쥐스

웹사이트가 온라인 게시판 형식을 띤 것은 웹사이트의 외형적 아름다움 이전에 주된 콘텐츠, 즉 돈선필의 작품과 그에 관한 글을 드러내는 맥락을 고안해낸 결과다. 워크숍에서 돈선필은 자신이 즐겨 드나드는 웹사이트 또한 게시판 형식임을 밝히며 자신을 둘러싼 콘텐츠가 온라인 게시판의 게시물처럼 소비되기를 바랐다. 한편, 2019년 12월 10일 일흔넷의 나이로 타계한 소프트웨어 개발자 랜디 쥐스(Randy Suess)를 기리려는 의도 또한 얼마간 있었다. 랜디 쥐스는 오늘날 사용되는 온라인 게시판 시스템의 시초인 CBBS(Computerized Bulletin Board System)를 고안한 인물로, 그가 아니었다면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그저 인쇄물의 시각적 문법을 모니터 화면에서 재현하느라 공연한 시간을 낭비했을지 모른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 시간은 한국금거래소에 업데이트되는 금 시세보다 값지다.

하구레 메탈(はぐれメタル) 피규어
피규어와는 조금 다른 <figure>

웹사이트의 프런트엔드(front-end)에서 첫 페이지, 즉 홈페이지는 ‘돈선필만을 위한 인스타그램’으로, 백엔드(back-end)에서 돈선필이 등록한 (돈선필의 관심사 또는 작품과 관련한) 아름다운 이미지가 접속할 때마다 무작위로 화면을 채운다. 웹사이트 운영자의 취향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일반적이고 쉬운 방법이다.

donsunpil.com에서 상자에서를 실행한 결과. <header> 속 요소의 스타일은 동일하지만, 구조에서는 제목으로도 기능하는 홈페이지(<h1>)와 게시판(<nav>)이 구분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돈선필의 작품, 돈선필의 작품에 관한 작품, 돈선필에 관한 작품이 드러나는 각 게시판에서 게시물은 등록한 날짜 역순, 즉 새로운 것에서 오래된 것 순으로 배열되고, 각 게시물은 돈선필의 희망 사항에 따라 마련한, 글, 이미지, 영상을 드러내는 데 적합한 방식으로 출력된다. 특히 이미지는 강박적일 만큼 <figure> 태그로 묶여 단순한 이미지가 아닌 ‘도판(figure)’으로서 콘텐츠의 맥락에 가까워진다. 이는 이제껏 돈선필이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어휘 ‘피규어(フィギュア)’와 그를 둘러싼 맥락에 천착해온 점과 무관하지 않다.

게시물 등록 버튼
게시물 편집 버튼

주지하건대 이 웹사이트는 온라인 게시판임에도 일반적인 게시판과 달리 운영자, 즉 돈선필에게 허가를 받은 사람만이 게시물을 등록하거나 편집할 수 있다. 게시물 목록 아래쪽에 자리한, (어쩌면 게시물보다 돋보이기를 바라는) 버튼3이 방문자의 일반적인 예상을 배반하고, 돈선필이 주로 사용하는 이메일 주소로 연결되는 까닭이다. (특히 모바일 기기에서 이 과정은 특별한 코드 없이도 놀라울 만큼 매끄럽게 작동한다.) 미술가가 운영하는 온라인 게시판에 게시물을 등록하거나 편집하려는 누군가의 욕망은 현실에서는 미술가에게 작품을 선보일 기회, 즉 전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런 기회가 많아질수록 (외형 때문에 아카이브 봄 기획자 윤율리, 민구홍 매뉴팩처링 운영자 민구홍과 함께 ‘형제’ 또는 ‘자매’로 불리기도 하는) 돈선필에게는 좋은 일이며, 이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에도 결코 나쁜 일은 아니다.

<!-- Running on Management by Min Guhong Mfg. -->

한편, 이 웹사이트의 백엔드는 매니지먼트(Management)를 기반으로 구동된다. 대표적인 프로그래밍 언어인 PHP로 제작된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제품 매니지먼트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포함해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고객이 콘텐츠를 아름다울 만큼 효율적이고 실용적으로 관리하는 데 이바지하는 콘텐츠 매니지먼트 시스템(Contents Management System, CMS)으로, 워크룸 프레스 웹사이트웹 기술을 이용한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제품 대부분에 사용된다.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웹사이트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매니지먼트는 웹사이트를 만들고 운영하는 일을 느닷없이 즐겁게, 그래서 왠지 웹사이트가 필요하게끔 만든다. 그 즐거움은 워드프레스카고 등이 제공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이에 관해서는 언젠가 소상히 밝힐 기회가 있으리라.


레인보 셔벗 앞표지. 제호에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전용 서체 타임스 블랭크가 사용됐다.

“직접 맛보지 않는 이상 상큼함을 느낄 수 없는 책” 레인보 셔벗(2019, 아카이브 봄·작업실유령)에서 밝히듯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여러 방식으로 회사, 즉 민구홍 매뉴팩처링 자체를 소개하는 일을 주 업무로 삼고, 그 과정에서 생산된 부산물을 이따금 제품으로 출시한다. 이 웹사이트처럼 주 업무의 범위에서 기술로서 고객의 행복을 실현하는 일에도 이바지한다. 공개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통해 행복을 실현하는 비용은 안타깝게도 퍽 저렴한 편은 아니다.

취미가에서 판매 중인 민구홍 매뉴팩처링 기프트 카드. 민구홍 매뉴팩처링에 기술을 의뢰할 때 제시하면 작업비 일부를 할인받을 수 있다. 물론 두둑한 작업비 대신 남다르고 매혹적인 조건을 내건다면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이를 흔쾌히 수락할 가능성이 크다.

일찍이 이 점을 인지한 돈선필은 민구홍 매뉴팩처링에 기술을 의뢰하며 두둑한 작업비 대신 남다르면서 매혹적인 조건을 내걸었고,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돈선필을 통해 회사의 주 업무, 즉 회사를 소개하는 일을 실현할 기회를 얻었다. 물론 이 글은 (민구홍 매뉴팩처링에 기술을 의뢰할 미래의 고객에게 회사를 소개하는 일을 어느 정도 수행함에도) 그 기회가 아니며 고객, 즉 돈선필을 위한 일종의 ‘서비스’이자 콘텐츠의 양상이 복잡한 게시물로서 돈선필에게 매니지먼트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안내하는 지침으로 기능할 뿐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웹사이트에 이름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웹사이트는 추억 속에 그저 웹사이트로 놓인다.


레인보 셔벗을 디자인한 그래픽 디자인 듀오 슬기와 민은 언젠가부터 그들의 웹사이트에 다음과 같이 밝히기 시작했다.

이 웹사이트는 늘 개정 중이다. 개정 작업은 공개된 상태에서 진행되므로, 여러분은 실시간으로 변화를 목격할 수 있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는 어딘가를 고치고 있는지 모른다.

웹사이트를 열람하기 전에 읽어보면 좋을 법한 (하지만 그러기에는 정작 기본적으로 두 덩어리의 햄버거 아이콘 속에 감춰진) 글의 제목은 일러두기였다.4 이 명제는 모든 웹사이트에 엄연하다. 내일이면 이 웹사이트에는 새로운 기능(예컨대 홈페이지에서 코나미 커맨드를 입력하면 전체 또는 일부 스타일이 바뀌는)이 추가될지 모른다. 새로운 질서를 부여받을 가능성도 있다. (재판[再版]하기 전까지) 영원히 박제될 수밖에 없는 인쇄물과 달리 웹사이트는 영원히 개정 중인, 그래서 이따금 벌레5도 몇 마리 꼬이는 (그래서 웹사이트에 대한 일반적인 은유인 ‘건축물’보다는 ‘정원’이나 ‘나무’ 정도가 적합한, ‘물기’를 머금은) 세계다. 이 세계에는 즐거움이 있고, 한편으로는 손목터널증후군을 유발할 가능성이 큰 위험 또한 도사린다.

새로운 질서에서는 무엇보다 다음 질문에 함께 또는 스스로 답해봅니다. “웹이 우리의 행복에 얼마나 이바지할 수 있을까?”


궁극의 워드 프로세서. 온전히 글을 쓰는 데 집중할 수 있는 다섯 가지 기능(쓰기, 지우기, 저장하기, 출력하기, 그리고 작성한 문장이 과연 적절한지 질문하기)이 탑재돼 있다.

이 글의 초안은 궁극의 워드프로세서에서 마크다운 문법을 준수하며 작성됐다. 궁극의 워드프로세서는 웹 브라우저 구글 크롬에서 동작하는 확장 프로그램으로, 소프트웨어인 듯하지만 사용되는 기술은 웹사이트와 같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대한민국의 주식회사 안그라픽스를 거쳐 워크룸에 기생하는 1인 회사로, 여러 방식으로 회사, 즉 민구홍 매뉴팩처링 자체를 소개하는 데 주력하며, 그 과정에서 생산된 부산물을 이따금 제품으로 출시한다. 2016년 여름 미국 시적 연산 학교와 기술제휴를 맺은 바 있고, 2018년 가을 ‘구글 폰트의 친구’가 됐다. “회사를 소개하는 데 일조하는 책”으로 레인보 셔벗(2019, 아카이브 봄·작업실유령)이 있다. https://minguhongmfg.com


  1. 조금 더 극단적으로 다가가면, 웹사이트에 관한 가장 완벽한 보일러플레이트는 팀 버너스리가 월드 와이드 웹과 함께 발표한 세계 최초의 웹사이트일지 모른다. 글줄이 길면 마우스로 웹 브라우저의 너비를 줄이면 그만이고, ‘뒤로 가기’ 링크가 <body> 속에 없더라도 웹 브라우저에는 이미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버튼이 탑재돼 있다. 태생적으로 ‘웹 브라우저’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는 웹의 작동 방식을 되새긴다면, 이는 불편하기보다 오히려 자연스럽다. 

  2. ‘브루탈리즘’이라는 어휘는 프랑스의 건축가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처음 사용한, ‘가공하지 않는 콘크리트’라는 의미를 지닌 ‘베통 브뤼(béton brut)’에서 유래했다. 몇 년 사이 ‘브루탈리즘’이 특히 웹사이트의 구조와 콘텐츠의 맥락을 설계하는 데 불필요한 환상을 입히는 만큼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평범한’이라고 바꿔 부르기를 좋아한다. 인터넷과 월드 와이드 웹이라는 기술이 갑자기 주어진 그 시절, ‘브루탈리즘’ 웹 디자인은 누구나 구사하던 가장 평범한 스타일이었다. 

  3. 시각적으로는 버튼인 체하지만 기술적으로는 하이퍼링크다. 

  4. 다만, 웹사이트의 영어 버전에서 이 글로 연결하는 하이퍼링크 문구는 ‘About This Website’고, 연결된 글의 제목은 ‘Notes on This Website’다. 물론 이런 귀여운 실수 또한 조만간 개정될 것이다. 그나저나 레인보 셔벗을 개정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5. 벌레를 발견한 분은 일차적으로는 돈선필, 이차적으로는 민구홍 매뉴팩처링 앞으로 제보해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