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 Sunpil

Player versus Player

돈선필
2020-08-25

아트선재센터 HOMEWORK


Player versus Player

2020년.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온라인 비대면 경제체제가 활성화되고 있다. 만남보다는 거리 두기가, 활동적인 생활보다 히키코모리를 장려하는 오늘날의 상황이 수개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낯설게 다가온다. 인터넷의 등장 이후 통신망의 비약적인 발전은 우리 생활 방식의 많은 부분을 자연스럽게 네트워크로 옮겨 놓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전환 과정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온라인 의존도를 더욱더 가속화시키는 상황이 되었다. 온라인 강의, 재택근무는 물론 웹사이트와 SNS를 이용한 각종 행사와 전시 플랫폼이 2020년 상반기에 우후죽순으로 등장하고 있다. 유튜브와 넷플릭스, 트위치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와 관련 사업 분야는 그 어느 때보다 가파른 성장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21세기가 되어도 사람과 사람이 완벽히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자리 잡기까지는 아직 먼 미래의 모습이라 막연히 상상했지만 팬데믹 사태에 따른 강제력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른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생각보다 우리는 대면에 많은 것을 의지해왔다. 새로운 직원을 뽑아야 한다던가, 백년해로를 기약하는 자리를 마련한다던가, 학업을 마치고 졸업장을 수여하는 순간이라던가, 큰 프로젝트의 사안을 결정하는 회의 등등. 이메일, 전화, 영상통화 등의 온라인 네트워크로 대체 가능한 방법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둔다. 대화의 순간을 떠올려보면 억양, 표정, 말투, 냄새, 제스처, 심지어 형용할 수 없는 그때의 분위기까지 활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언어에 포섭되지 않는 대화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항상 누군가와 대면한다. 그런데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대응책으로 제시된 사회적 거리 두기와 온라인 플랫폼은 우리가 이제까지 사용해왔던 대화의 형태를 변화시킨다. 유튜버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나 스트리머의 혼잣말에 가까운 생방송 과정을 떠올려보자. 이런 대화는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내용과 의미를 전달하고 있지만, 대화가 발화하는 과정에 모순이 담겨있다. 실체를 마주하지 않고 시공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단절감과 온라인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감이 동시에 존재한다. 익숙한 모습을 빌려 낯선 방식으로 채워진 대화들이 네트워크를 부유하는 셈이다. 이런 변화는 이제 선택이 아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비대면 사회는 어떠한 태도로 수용해야 할까. 의외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일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현실 공간에서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고 자신의 능력을 겨루는 자리, 대인(對人) 경기 혹은 PvP(Player versus Player)라 불리는 게임, 경기, 시합과 같은 상황은 독특한 태도의 대화가 꾸준히 이어지는 환경 중 하나다. PvP를 대표하는 것을 정리해보자면 바둑, 장기, 체스 같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보드게임에서부터 복싱, 태권도, 유도, 격투기, 펜싱, 테니스, 탁구 같은 스포츠와 스트리트파이터, 철권, 길티기어 시리즈 같은 격투 게임은 물론 매직 더 개더링, 포커, 화투와 같은 카드 게임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게임을 진행하는 규칙과 승패를 겨루는 방식이 모두 상이하지만 PvP의 공통된 특징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마주하고 언어를 쓰지 않은 채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대화보다는 게임의 자웅을 겨루는 자리이기에 시합 중 언어를 주고받는 시간은 극히 짧거나 거의 없는 경우가 다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에서는 이미 끊임없는 대화가 이루어진다. 작은 제스처로부터 심리를 읽어내고 이에 대해 반응하는 상호작용이 언어적, 심지어 비언어적 범주의 소통만큼이나 치밀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PvP가 품고 있는 대화의 특이점은 무엇일까.

전 바둑기사인 이세돌은 2016년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와 5번의 대국을 치른다. ‘인공지능과 프로 기사의 대결’, ‘유일무이한 인류의 1승’과 같은 자극적인 문구보다 훨씬 흥미로운 장면을 대국 중에 발견할 수 있다. 이세돌은 알파고를 대신하여 바둑판 위에 돌을 옮겨주는 아자 황의 얼굴을 반복적으로 쳐다보는데, 이런 행동은 상대방의 심리를 알고 싶어 하는, 혹은 상대방에게 무슨 생각인지 질문하는 프로기사들의 습관이다.1

알파고의 한 수에 의문점이 생긴 이세돌은 반사적으로 아자황의 얼굴을 쳐다본다

대국의 상대가 컴퓨터 프로그램이란 사실을 이해하고 있지만, 판 위에 펼쳐진 확률 계산보다 기보를 만들어가는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싶다는 욕망이 반사적인 행동을 하게 만든 셈이다. 그러나 알파고는 분석적인 확률 계산만 남긴 채로 아무 대답이 없다. 이 자리에서의 대면은 무의미하다. 여기서 대화는 기보뿐이다. 작은 판 위에서 수를 겨루는 PvP의 경우는 한 수 한 수가 자신이 상대에게 던지는 질문인 셈이다. 이런 과정에 대한 구체적 묘사는 우미노 치카의 『3월의 라이온』에서 친절하게 서술된다. 이 작품은 쇼기2 기사의 삶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끝없이 반복되는 대국의 과정이 전략적인 승률 계산을 위한 승부의 장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기보를 만들어 과정, 한 수 한 수가 프로기사라는 사람의 삶의 방식과 생각, 인생의 궤적을 도려내어 만들어가는 지도라는 사실을 전달한다. 작은 장기말 하나의 움직임은 고통스러우면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양날의 검이자 상대에게 제시하는 용기의 언어인 셈이다.

같은 PvP에 속하지만 긴 시간을 고민하며 수를 주고받는 바둑, 장기와 달리 초 단위로 전개되는 대화의 방식도 존재한다. 대전 액션 게임 혹은 격투 게임이라 불리는 비디오 게임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격투 게임의 역사를 파헤쳐보면 『퐁(Pong)』과 같은 상징적인 비디오 게임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하고 액티비전의 초창기 게임인 『복싱(Boxing)』처럼 스포츠 경기의 시스템을 비디오 게임으로 번안한 소프트를 근원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 격투 게임이라 명명하는 게임들은 캡콤의 1991년 작 『스트리트파이터2』의 기본 골조에서 파생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한 화면에 마주하는 두 명의 캐릭터가 정해진 시간 안에 상대방의 체력을 소진시키는 시스템은 게임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레이아웃으로 설계되어 있다. 또한, 방향키와 버튼의 조합으로 사용하는 필살의 기술이나 현대 격투 게임의 가장 중요한 시스템인 ‘캔슬3’까지 이 모든 골격이 『스트리트파이터2』에서 출발한다.

보통 격투 게임은 1분 내외의 짧은 시간 안에 승부를 결정짓는다. 한 경기가 몇 시간씩 진행되는 바둑과는 달리 찰나의 순간에 많은 대화가 오가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빠른 호흡은 여타 PvP 스포츠들과 유사한 면을 보이지만 자신의 신체를 직접 사용하는 것이 아닌, 가공된 캐릭터의 신체를 컨트롤러를 통해 간접적으로 조작한다는 측면에서 궤를 달리한다. 복잡한 커맨드를 각종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 순간 판단력과 숙련된 손놀림의 조합을 요구하기 때문에 초심자와 프로 간의 격차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어느 정도 격투 게임의 입문 단계를 넘어선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상대방 캐릭터의 움직임을 10초 정도 관찰하는 것으로도 이 사람이 초보인지, 고수인지, ‘고인물’인지 생각보다 쉽게 알 수 있다. 버튼 하나를 누르면 발동하는 간단한 발차기 동작에서 이 사람의 기량을 판가름 할 수 있는데 이는 과장이 아니다. 마치 무술의 고수가 준비 자세로 상대의 역량을 판단하는 것과 같은 체험이 가능하다. 같은 발차기라도 어떤 상황, 어떤 거리,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지에 따라 의미 없는, 용감한, 무모한, 경이로운 등의 다채로운 수사를 적용할 수 있게 된다. 이다음 단계는 끝없이 주어지는 문답의 과정이다.

언어가 주어진 규칙 안에서 사용자가 자유롭게 조합해서 사용하는 게임이라고 정의한다면 그것에 가장 근접하게 재현한 시스템은 격투 게임이다. 캐릭터와 캐릭터가 대치된 상황은 일종의 논쟁과 같다. 변호사와 검사의 대결, 질문과 답변, 우문에 현답을, 잘못된 대답에 벌을 줄 수도 있다. 간결하게 요약한다면 가위, 바위, 보와 흡사한 면도 있는데 이 과정이 단순한 로직이라기보다는 심리전의 양상이 좀 더 강하게 반영된다. 사람마다 말투나 글쓰기에 스타일이 존재하듯, 같은 캐릭터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마다 사용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이는 말버릇과 같이 고유한 행동 패턴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패턴은 대전 중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칼과 방패가 되기도 하고 역으로 상대를 속이는 함정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벌어지는 대화의 양상은 모니터 너머의 그래픽, 캐릭터의 팔과 다리를 통해 끊임없이 연결된다.

유튜브채널: HiFight

오늘날 바둑과 격투 게임 역시 온라인을 통한 대전이 가능한 상황에서 ‘대면’은 대화의 핵심이 아니다. 이 장르의 대화를 이끌어 가는 것은 바둑돌 혹은 캐릭터라 부르는 언어의 궤적에 있다. 바둑과 격투 게임은 공유할 수 없는 별개의 영역에 각각 자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공방의 차례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기회가 올 때 유리한 정황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매우 닮아있다. 무엇보다 ‘수읽기’라고 불리는 대전의 흐름을 생각해보자. 상대방이 자신에게 던진 제안을 수용하고 그다음에 다가올 몇 가지의 미래를 예측해야 하는 것은 이 대화들의 공통분모인 셈이다. 바둑의 전설 이창호 9단이 청소년 시절부터 『스트리트파이터2』와 같은 격투 게임 고수였다는 에피소드에 주목해보자. 바둑과 격투 게임, 외관과 형식이 전혀 다른 두 개의 시스템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구조가 다른 대화의 방법이 서로 호환 가능하다는 증거인 셈이다. 게임센터의 조이스틱을 움켜쥔 바둑 기사의 사진은 언어를 다루는 방식이 달라도, 여건과 상황에 따라 급격한 변화가 동반한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우리는 관습적 언어의 사용법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대화의 태도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때로는 얼굴 근육에 의지해, 때로는 작은 사물과 도구에 의지해, 때로는 가상의 캐릭터나 도상에 의지해, 때로는 언어로 진술하지 못할 그 무엇에 의지해 대화를 이어간다. 이런 대화는 방 안에 홀로 앉아 6개의 버튼이 달린 게임패드를 두드리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연결되고 있는 것 아닌가.


  1. AlphaGo - The Movie | Full Documentary (2017)  

  2. 将棋, 일본식 장기  

  3. ‘캔슬’이란 특정 기술이 발동하는 순간 새로운 커맨드를 입력하면 발동 중인 기술이 취소되고 즉시 다음 기술로 이어지는 일종의 버그다. 이 버그는 게임 시스템의 명료함보다 플레이어가 찾아내는 새로운 가능성을 선호했던 스트리트파이터2의 디렉터 니시타니 아키라의 혜안으로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