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 Sunpil

스포일러와 해석 사이에서 말하기

우아름
2015-02-27

*이 글은 작업 감상을 완료한 후 읽으십시오.

선 위의 모뉴먼트 시리즈_성매매 여배우 민영화씨, 2014
선 위의 모뉴먼트 시리즈_KEEP CALM AND CARRY ON, 2014
선 위의 모뉴먼트 시리즈_Nice Boat, 2014

선 위의 모뉴먼트: 작가로부터의 전언

돈선필 작가가 이번 전시에 선보인 작품 선 위의 모뉴먼트는 인터넷 환경에서 유저들에 의해 생성, 사용되고 마침내 그 기한을 다해 사라져가는 밈들을 망각에서 건져내 기념하고자 제작한 세 개의 기념비와 그들을 보조하는 배너 이미지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각각의 기념비의 제목의 뜻을 살펴보면, ‘성매매 여배우 민영화 씨’는 철도노조의 민영화 반대 파업 무렵 터진 성매매 스캔들에 휩싸인 여배우의 이름이 민영화라더라,는 소문과 얽히면서 오히려 철도 민영화 이슈가 단번에 검색어 순위에 오른 사건을 기념한다. ‘KEEP CALM AND CARRY ON’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정부가 불안에 휩싸인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포스터로 제작한 문구이다. 제작 당시에는 종전과 맞물려 빛을 보지 못했다가 1970년대 후반 우연히 발견된 이후 ‘KEEP CALM AND GO SHOPING’, ‘KEEP CALM AND BUY SHOES’와 같이 다양한 변종 카피 문구를 통해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NICE BOAT’는 잔혹한 내용으로 방송 금지 처분을 당한 일본의 애니메이션 스쿨데이즈의 마지막 회 방영 당시, 해당 영상 대신 송출된 아름다운 강 위의 보트 영상에 대해 미국판 디시인사이드 채널인 ‘포첸’의 한 유저가 남긴 댓글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후 영상 매체에서 과격한 장면이 나올 때 외치는 감탄사 등으로 쓰였던 말이다.

이러한 설명에는 몇 가지 의문이 따라온다. 과연 이 기념비들은 각각의 사건을 떠올려 기념하게 할 만큼 충분히 재현적인가? 그렇다면 이 줄거리를 알고 있는 자들만이 상정된 관객일까? 그리하여, 이 줄거리를 알거나/모르는 우리는, 어떤 감상의 회로 안에 있을까.

우회로: 돈선필의 작업 여정

나의 힘, 2010

돈선필의 작업 여정은 2010년작 나의 힘에서 시작한다. 상대방을 향해 활짝 웃어 보이는 표정의 이모티콘(:-D)을 커다란 캔버스 프레임에 옮겨 놓은 평면 작업과 이 이모티콘을 작가에게 전송했던 누군가에 대한 인상을 기록한 글로 된 드로잉이 한 세트를 이루는 작업이다. 작업 제목과 어울려 꽤 서정적인 정취를 자아내는 이 작업은 그러나, 대화 물질로서의 기호에 관한 호기심에서 비롯됐다. 이후 작가는 대화와 언어, 기호의 쓰임새에 천착해 리서치 베이스의 작업을 지속해 왔다. 리드미컬한 핑퐁 게임처럼 핑-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잘못된 흐름을 타는 대화들, 테이블에서 떨어진 탁구공처럼 의도와 다르게 엇나가는 말들에 대한 관심이자, 무엇이 공을 엇나가게 하는지에 대한 연구였다.

Synecdocher, 2011
REAL & “”Real”“, 2011
opening, 2011
watchmen, 2012

2011년, 작가는 그간의 리서치를 도표화하고( Synecdoche) 이를 평면 설치 작업(Real&“”Real“”), 공간 설치작업(Opening(2012), Watchman(2012))으로 이어 간다. 일련의 작업들은 자칫 관념적인 개념의 나열로 흐를 수 있었던 작가의 관심사가 간결한 형상화로 방향을 트는 터닝 포인트가 된 과정이자, 작가가 사물의 힘을 작업 안으로 끌어들여오는 계기가 된 과정이기도 했다. 한 가지 주제에 관한 골똘한 연구가 서로 다른 매체와 표현을 거치면서 새로운 작업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작가는 그간 천착했던 기호의 용법과 언어 구조에 관한 관심과 주변 사물을 이용한 설치에 대한 관심의 접점을 조율하게 됐다.

정립하는 현존재, 의지없는 자아, 종의 기원, 2012

2012년 정립하는 현존재, 의지없는 자아, 종의 기원은 돈선필의 작업 여정의 한 분기점이다. 이 작업은 일본의 투채널 사이트에 올라온 퀴즈ㅡ남성의 발기를 철학적으로 표현하라는 제안에 응한 수많은 유저들의 댓글 중 작가가 본인의 마음에 드는 세 가지 문구를 뽑아 작업 제목으로 삼고, 마네킹을 사용해 정답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간의 작업이 언어의 구조에 관한 독자적인 리서치에 기반했다면, 이 작업은 언어의 유희적인 사용법의 한 사례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는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조합하여 하나의 상황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조합술은 본 전시작 선 위의 모뉴먼트에도 기법적으로 유효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

Our Vigor: 앎과 겸손한 그림과 고양감을 위한 게임적 놀이, 2013

2013년부터 진행해 오고 있는 작업 Our Vigor: 앎과 겸손한 그림과 고양감을 위한 게임적 놀이는 미술 전시장에서 구현해 봄직한 게임의 상황을 축소 모형을 써서 구성한 작품이다. 이 게임은 전시 관람의 위치를 놓고 펼쳐진다. 전시장에 입장한 사람들은 안내원과의 간단한 게임 후에 작품을 관람하기 좋은 위치를 선점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그저 전시장을 배회하면서 전시장 바닥에 놓인 형상을 가늠해야 한다. 언어와 기호에 관한 작업 시리즈가 그러했듯, 이 작업도 아직은 여러 버전을 통한 실험 가운데 있다. 흥미로운 점은 작품 속 미니어처화된 작업이 실제 관람객을 위해 휴먼스케일로도 전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축소 모형으로 제시된 놀이의 상황과, 그 상황을 관람하는 실제 관람자의 상황이라는 두 겹의 상황이 교차하고 있다. 그의 작업이 조금씩 관객을 다층적인 해석의 게임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선 위의 모뉴먼트

다시 이번 전시 작업으로 돌아오자. 각각의 기념비가 재현하는 세 가지 사건은 각자 그 양상이 다르긴 하지만, 언어 자체의 뜻과 그 발화 과정에서의 쓰임새에 변곡점이 존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작가는 의사소통 과정에서 기호가 변모되어 쓰이는 상황에 흥미를 느끼고 이것을 다른 차원에서 재현한 후, 이 오브제들을 기념비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크기로나 성격으로나 공공의 기념비라기보다는 개인적인 트로피에 가까워 보이는 이 소형 오브제들이 과연 어떤 사건을 기념하거나 기억을 보조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 작품 감상의 묘미는, 이 합성된 오브제 다발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늠해 보려 할 때 관객의 머릿속에 펼쳐지는 인식의 게임이 아닐까?

사라져 가는 밈들에 대한 안타까움에 기념비를 제작했다는 작가의 간결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그간의 작업의 여정을 소개하는 우회로를 밟아 나는 이 작품을 작가가 제안하는 게임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가의 설명과 다른 설명을 하는 이유는, 게임은 룰이 정해진 놀이이지만, 어떤 게임은 룰을 재편하는 것이 해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기념비는 어디선가 들어봤을 수도, 생경할 수도 있는 사건 혹은 구호를 힌트처럼 제목으로 달고 있다. 제목이 곧 정답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게임에서 당신은 실패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리송한 제목과 형상 사이에서 잠시나마 고민했던 암중모색의 시간이 바로 예술이 자리잡는 장소가 아닐까? 사실 이 게임에는 정답도 승패도 없다. 여러 모로 생각해 보는 가운데, 작가도, 나도, 그리고 관객 여러분도 모두 같은 게임 안에 있을 것이다.

상상마당, 삶은 어찌 이리 느리며 희망은 또 어찌 이리 격렬한가전시 도록 게재
2015. 2. 27~3. 15

원문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