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 Sunpil

피규어 TEXT_002

돈선필
2016-04-10

2.

망가와 애니메이션의 핵심은 2차원의 캐릭터에 있다. 캐릭터라는 관념을 ‘사물화’하는 것이 일본의 ‘캐라’를 성립하게 하는 특수한 방법이라면, 이러한 ‘캐라’를 이용해 현실의 물질로 가장 훌륭하게 구현해내는 방법이 바로 피규어1다. 보통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2차원 캐릭터를 합성수지나 금속을 이용해 제작한 축소 모형을 말한다. 평면의 이미지를 현실로 소환한 작은 조형물인 셈이다.

일본의 ‘캐라’처럼 관념을 ‘사물화’ 시키는 방법론을 가장 훌륭하게 응용하고 있는 것이 ‘캐라’를 ‘실제의 작은 물체’로 제작하는 피규어다. 허수로만 존재하는 이미지를 실존하는 덩어리로 만든다. 언뜻 보면 간단한 이야기 같지만 쉬운 문제는 아니다. 어떤 관념과 어떤 사물이 있다. 둘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이 두 가지를 어떻게 같은 연장선으로 묶어낼 수 있는가? 이는 단순히 모양과 색이 비슷하다고 설명하고 지나칠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캐릭터의 이미지가 캐릭터라는 물체가 된다. 사물과 이미지가 서로를 지시하게 한다. 피규어는 명백하게 다른 시공에 존재하는 두 개의 명제를 연결해내는 고도의 게임인 셈이다.

현실 속에 존재하는 물질로서 피규어의 형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피규어를 구성하고 있는 비물질적인 조건들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피규어를 구성하는 조건을 다음 3가지로 분류해서 접근해보자. 첫 번째, 피규어는 ‘캐라’에서 시작한다. ‘캐라’처럼 ‘사물화’가 발생하는 일본 사회 문화에 대해 좀 더 살펴본다. 두 번째, 피규어는 선주문을 통해 생산되는 상품이다. 피규어가 생산되고 존재하게 되는 구조 속에서 수집가의 역할과 상관관계를 엮어 분석해본다. 세 번째, 피규어는 작은 사물이다. 피규어가 작은 크기의 축소모형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피규어와 수집가 사이에 발생하는 상황과 시간에 대해 집중해본다.

2.1.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일본의 문화현상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모에(萌え)’다. 일본의 캐릭터, ‘캐라’의 디자인 경향으로도 불리는 모에는 현재 일본 내에서는 자연스러운 사회 현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모에에 대한 수요와 관심이 높아지면서 모에를 이용하는 여러 사례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마을의 특산품이나 시장의 이미지를 모에화하여 홍보에 이용하기도 하고, 사찰에서 불상을 모에화한 불상 앞에서 불경을 외우기도 한다. 전철과 빌딩, 길거리 현수막 등 일본 시내를 한 바퀴 둘러보면 아주 쉽게 모에 캐릭터를 만날 수 있다.

모에는 본래 ‘싹트다.’라는 의미의 단어이지만 일본 서브 컬처나 ‘캐라’를 설명할 때는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한국식 번역은 의인화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는데 이것은 적절한 번역이 아니다. 사람이 아닌 것에 인격을 부여하거나 빗대는 것이 의인화라면 인물, 성격, 사물 등에 매력적 성향을 ‘구체화’하는 것이 ‘모에’다. 싹이 튼다는 모에의 원래 의미처럼 성향과 감정을 발화하게 하는 상황과 형태를 가리키는 단어가 바로 모에다. 모에의 기원은 모호하지만 보통 80년대 전후 서브컬처 산업의 성장 과정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모에의 의미를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대표적인 ‘캐라’로 90년대 말에 제작된 디지캐럿(1999)의 데지코를 들 수 있다.

모에 캐릭터(코게돈보*, 1999, 디지캐럿)

도상적 이목구비, 큰 방울, 메이드 복장과 고양이 귀, 더듬이처럼 뻗어 있는 머리카락. 모에 속에서 ‘캐라’의 이미지는 구체적인 사물의 조합이 된다. 사물의 조합을 바탕으로 ‘캐라’의 성격과 속성이 부여된다. 모에는 마치 ‘캐라’를 디자인하는 템플릿처럼 인물과 성격을 정형화한다. 보라색은 냉철하고 진지한 성격이라던가, 안경을 쓰고 있다면 지능이 높다든지, 머리카락이 뻗어있다면 덜렁거리는 성격이라는 일종의 클리셰를 양산해낸다. 단지 외형뿐만 아니라 나이, 취미, 버릇, 행동, 식성 등 뚜렷하게 가시화하기 어려운 영역도 모에화의 카테고리에 포함 시킨다. 모에란 단어는 명사, 형용사처럼 사용되며 대상의 상태를 ‘모에화’라는 물질적인 장소에 자리하게 한다. 어찌 보면 추상적인 대상을 구체적인 사물로 형상화하는 방법론은 인류 보편적인 형식이다. 추상적인 상태보다는 구상적인 대상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아주 사소하고 작은 감정들마저도 ‘사물화’하여 받아들이는 사고의 자세는 일본 문화에서 상당히 도드라져 보이는 현상이다. 앞서 설명한 모에라는 사회 현상이나 ‘캐라’처럼 관념을 물화의 방향으로 끌고 가는 ‘사물화’는 일본 서브컬처계나 애니/망가 캐릭터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일종의 풍습이나 전통처럼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에 배어있다. ‘사물화’는 일본의 생활 방식 중 하나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물화’의 흔적은 일본의 일상 언어에서도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일본어로 ‘もの’라고 할 때 그것은 물질을 의미하는 ‘物’보다는 ‘모노가나시사(物悲しさ왠지 서글픔)’의 ‘모노’이며, ‘모노구루오시이(物狂おしい미칠 것 같음)’의 ‘모노’이며, ‘모노스고이(物すごい굉장하다)’의 ‘모노’이며, ‘모노모노사이(物物しい어마어마하다)’의 ‘모노’이며, 그리고 유명한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はれ)’2의 ‘모노’인 경우가 훨씬 흔하다.”3

이런 단어와 문장들은 대부분 상황이나 분위기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데, 사물을 지칭하는 ‘모노(物)’라는 단어를 의미와 상관없이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감각이나 관념을 추상적인 대상이 아니라 마치 손에 잡히는 형태가 있는 것과 같은 정서가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야기, 전설을 뜻하는 ‘모노카타리(物語)’ 에도 ‘모노’가 사용된다. 이야기, 대화나 말에 가까운 단어인 ‘하나시(語)’ 앞에 ‘모노(物)’가 붙어서 ‘모노카타리(物語)’가 된다. ‘하나시’는 우리의 대화가 흩어지는 연기처럼 발화 시점부터 사라지듯이 물질로서의 무게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노가타리’가 되면 마치 한 권의 책처럼 무게를 얻는다.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이야기는 실체 없이 시공을 헤매다가 산화하지만, 그 소문이 어느 순간 ‘모노’의 옷을 입고 실존하는 듯한 ‘요괴의 전설’이 되면 ‘모노가타리’로 변모한다. 이처럼 일본어는 감정과 상황, 이야기가 마치 덩어리가 되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과 같은 상태로 구조화된 언어다. 추상적인 상태의 모호함보다는 구상적이고 명료한 상황을 더 선호한다. ‘모노노아와레’의 애잔한 감정은 벚꽃의 모습으로, 중력에 이끌려 바닥을 향해 낙하하는 곡선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물화’ 미술 작품(가츠시카 호쿠사이, 1832,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지난 시간의 ‘사물화’ 흔적을 찾기 위해 좀 더 일본의 전통적 분야를 살펴보자. 일본을 대표하는 그림 중 가장 유명한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神奈川沖浪裏 かながわおきなみうら 가나가와오키나미우라>4속의 파도는 마치 거대한 산맥 같다.

“그러므로 부서지는 거친 파도의 흰 비말(飛沫)이 그 그림에서는 하나하나 얼어붙은 점이 되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수평선으로 퍼져가는 파도의 무한한 확산과 그 연속적인 시간은 커다란 하나의 파도로, 한순간의 움직임으로 축소되었다.”5

원래 파도라는 것은 사물이 아니다. 현상에 더 가깝다. 바람과 수면이 만들어내는 파장의 한 종류다. 호쿠사이가 작품을 제작할 때 파도가 몰아치는 찰나의 순간을 담아내는 장비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럽에서 한창 초창기 카메라와 사진이 싹을 틔우고 있을 무렵 호쿠사이는 스스로 카메라가 되었다.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수면을 바라보며 반복되는 형태를 감지했을 것이다. 작가는 파도라는 현상을, 손에 잡을 수 없는 파장을 하나의 사물로 인식해갔다. 바닷물, 액체는 정해진 형태가 없다. 호쿠사이의 파도의 물살은 단단한 절벽 같고 흩날리는 파도의 끝은 손을 뻗는 듯 날카로운 갈고리처럼 힘이 있다. 호쿠사이라는 카메라를 통해 파도라는 현상은 조밀한 조각처럼 번역되어 있다.

일본의 전통 공연 예술 중 하나인 노(能)에서도 감정을 구현하는 ‘사물화’와 같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노에서는 노멘(能面)이나 오모테(面)라고 부르는 가면을 착용한다. 보통 여성, 원혼, 요괴, 생령 같은 대상을 연기할 때 쓰게 된다. 언뜻 보면 대부분 유사해 보이는데 묘사된 머리카락이나 눈주름, 잔 근육, 얼굴의 색으로 나이나 감정, 인물이 겪었던 상황을 세세하게 분류하고 있다. 특히 가면의 형태를 통해 감정을 알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등장인물의 내면 감정을 주요 역할로 설정하고 가면이라는 유사 얼굴로 성격을 조형한 것이다. 질투심에 가득 찬 여인의 생령을 묘사한 가면은 치켜뜬 눈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색 구겨진 미간과 힘이 들어간 광대로 조형되어 있다. 분노의 감정은 어금니와 뿔로 나타난다.

노멘(能面)

노멘에는 표정이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노멘은 전반적으로 희로애락을 구분하기 어려운 모호한 표정을 지니고 있다. 가면 문화는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노멘처럼 무형의 감정 상태를 형상화하기 위해 모호한 표정으로 제작되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노멘은 보는 각도에 따라 가면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모호한 표정으로 제작되는 노멘을 쓴 배우는 상황에 따라 정교하게 얼굴의 방향을 조절한다. 노를 연기하는 배우들은 목소리를 통해 인물의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 가면과 가면의 각도에 따른 조형적 표정변화로 감정적 서사를 끌어낸다. 노멘은 노를 다른 공연예술과 다르게 만드는 핵심적인 장치다. 노멘은 사람의 실제 얼굴 크기보다 작게 제작되어 노멘을 착용하면 광대나 턱이 노출된다. 마치 얼굴 위에 얼굴을 덧붙여 놓은 듯한 기묘한 인상을 풍긴다. 노멘은 배우의 얼굴을 대신하는 위장 소품이 아니라 노에서 다뤄지는 다양한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의 내면이 응축하고 있는 유사 얼굴 조각임을 감추지 않는다.

일본 문화와 생활 전반에 걸쳐있는 ‘사물화’는 일종의 생활 풍습에 가까워 보인다. 망가와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물화하여 속성과 이미지를 디자인하는 경향도 이 ‘사물화’가 가져오는 현상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모호한 상태보다는 명료한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마치 손에 잡힐 정도로 대상이 뚜렷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피규어 생산국, 건프라6의 고향, 미니어처의 메카, 정교하고 세밀한 금형의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대상을 집요하게 사물로 번역하는 정서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코, 우연이 아니다.

2.2.

피규어 수집에 취미를 두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새로운 제품에 대한 정보를 이미지로 먼저 접하게 된다. 형태가 있는 물리적인 덩어리가 아니라 발광하는 모니터의 입자들을 통해 전달되는 간접 이미지를 보게 되는 셈이다. 피규어는 고도의 복제 기술과 복잡한 생산 공정이 필요한 산업 상품이다. 원형을 복제하고 양산 위한 고가의 금형과 여러 단계의 공정이 필요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피규어 제작사는 생산을 시작하기에 앞서 재고가 발생하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 ‘선주문 시스템(pre-order system)’을 애용한다.

높은 퀄리티의 시제품을 제작하고 고화질의 사진으로 이미지를 만들고 그것으로 광고와 함께 선주문을 받는다. 수주 기간이 끝나면 이 제품에 대한 수요를 기준으로 생산 수량을 조절한다. 수집가는 모니터를 통해 보게 되는 평평한 이미지와 건조하게 숫자로 기록된 스케일을 확인하고 자신의 눈앞에 놓일 조형물을 상상하게 된다.
기호학에서 어떤 기호가 대상과의 실존적인 연결성이나 인과적인 관계가 있는 경우에 지표(index)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존적인 연결성 즉, 현실과의 접점이다. 사진은 실존하는 피사체의 흔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표다. 이처럼 지표는 대상과 기호가 서로 밀접하게 대면하고 있다. 다른 차원에서 관념으로 이루어지는 철학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눈앞의, 손안의 사건이다.

사진은 기본적으로 지표다. 현실의 피사체를 필름이나 전자회로에 담아내는 현실의 자국이다. 하지만 피규어의 시제품 사진은 사진이 아니다. 수집가가 접하는 시제품 사진은 도상에 가깝다. 그것은 현존하는 대상이 아닌 아우라를 지닌 이상형이다. 시제품은 실제품보다 기본적인 퀄리티가 높다. 높을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광고를 위한 환상적 이미지다. 맥도날드 매장에 설치되는 햄버거 사진을 떠올려보자. 기본적으로 광고용과 판매용은 같은 재료를 사용하고 있지만 조립 단계에서 큰 차이가 있다. 재료 하나하나를 쌓아가는 정성과 시간이 다르다. 맥도날드에서 빅맥을 주문하는 사람은 사진 속 이미지와 같은 먹음직스러운 빅맥을 기대하지 말아야 하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피규어 수집가는 이미지만을 통해 근미래에 자신에게 도달할 입체 조형물을 렌더링한다. 시제품의 평면 이미지와 손에 잡히는 실제품의 격차를 가늠한다. 보통 광고용 시제품은 도자기 이상의 밀도를 지닌 고품질 레진7으로 제작된다. 양산형으로 생산되는 PVC 피규어와는 원재료부터 차이가 생긴다. 모니터 속 피규어의 이미지는 채색 전문가와 사진 전문가가 만들어낸 성상화(聖像畵)에 가깝다. 수집가는 모니터 이미지와 동일한 피규어가 제작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한다. 이상적인 이미지를 보면서 열화되는 디테일을 상상한다.

수집가의 선택은 피규어의 실존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피규어의 제작은 선주문 시스템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실질적인 생산자는 제작사지만, 결정권은 수집가에게 달려있다. 오늘의 창작자는 제작하는 것이 아닌, 선택하는 사람이다. 수집가는 무수한 소비를 한다. 관념과 사물을 연결하는 고도의 기술은 마우스 버튼을 누르면서 모든 게 결정된다. 모니터에 나타나는 시제품의 이미지는 카메라의 뷰파인더 속 풍경처럼 보인다. 마치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듯이 마우스를 클릭하면 피규어는 지표가 된다.

2.3.

스케일은 관찰자의 방위를 결정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문제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150~200cm 내외의 신장을 갖고 있고 이 정도 크기에서 세계를 바라본다. 인간의 몸집이 개미 정도로 작거나 고래 정도의 거대한 크기였다면 세계가 작동하는 구조 자체가 지금과는 아주 달랐을 것이다. 마블 코믹스 원작의 영화 <앤트맨>(2015)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몸을 자유자재로 축소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특수한 장치로 제작된 슈트를 입고 손 위에 버튼을 누르면 몸이 개미만 한 크기로 축소된다. 물리법칙을 죄다 무시하는 이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사람의 크기 즉, 휴먼스케일에서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이하로 축소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영화상에서 주인공은 개미만 한 크기로 몸이 축소되면서 상대적으로 익숙한 물건이 비대해지는 시각효과를 체험하게 한다. 화장실의 욕조가 축소된 주인공에게는 거대한 산맥처럼 다가오고 가방 안 소지품들이 거대한 무대장치 같다. 주인공의 작아진 몸 때문에 주변의 시간도 상대적으로 느려지게 된 것처럼 보인다. 스케일이 변화하고 물리적인 거리감이 달라지면 시간의 축도 변한다. 시간이라는 경험은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건축과의 졸업전시에 가보면 축소모형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각양각색으로 설계한 건축물의 정보가 상세하고 친절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이해하기 어렵다. 축적으로만 표기된 공간의 크기를 산술적으로 파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건축모형은 건축물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건축 모형을 감상하면서 그 사이사이에 함께 배치되는 축소 인체 모형으로 건물의 크기와 디자인된 공간의 면적을 가늠하게 된다. 손가락 마디만 한 크기의 인체 모형은 건축모형 안으로 관람자를 끌어당기는 블랙홀 같다. 미니어처는 그 작은 크기에 입체의 조건을 물리적인 최소 단위로 응축시켜놓은 고밀도의 조각이다. 작은 모형과 미니어처를 볼 때 집중하게 되는 이유도 그것들의 작은 크기에 때문이다. 작은 크기 덕분에 얻게 되는 다른 한 가지는 물리 조건을 뛰어넘는 시점의 변화다. 조감도(bird’s-eye view, 鳥瞰圖)라는 단어 속에는 사람이 태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시선이 담겨있다. 비행기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조감도는 신의 눈과 같았을 것이다. 신화 속 신의 관점에서 인간의 삶이 얼마나 작고 무력한지를 서술하는 대목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신에게 인간은 벌레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다. 작게, 한눈에 들어오는 대상은 너무나 쉽게 이해되고 통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고 가정해보자. 비행기가 이륙이나 착륙을 할 때 창문 밖으로 보이는 작디작은 도시를 보면 미니어처를 보는 기분에 빠지게 된다. 하나의 마을과 도시가 내 눈과 내 손안에 들어올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이런 경험은 비행기를 타거나 높은 산에 올라가듯 물리적인 위치를 바꿔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눈앞의 대상이 축소되었을 때도 이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미니어처 모형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늘을 날고 있는 새와 같은 시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작은 대상 앞에서 우리는 전지적 시점을 얻게 된다.

피규어는 기본적으로 축소의 산물이다. 일단 물리적인 크기도 작다. 보통 10~60cm 내외다. 등신대 피규어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들은 피규어라기 보다는 동상이나 기념비에 가깝다. 생산단가나 수집의 용이성을 위해 작은 크기를 유지하는 것도 주된 이유겠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우리는 피규어가 물리적으로 작은 크기 속에 여러 이미지를 응축시켜 놓은 집합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피규어가 캐릭터의 파생 상품임을 생각해보자. 캐릭터라는 ‘관념’에는 스케일이라는 것이 없다. 추상적 대상에 크기나 방위가 적용될 리 없다. 일본의 ‘캐라’가 ‘사물화’되어 다뤄진다 하더라도 그 자체의 물리적 성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캐릭터는 일종의 허상이다. 캐릭터라는 이미지를 입체로 변환하는 피규어의 특성은 추상적인 관념에 정확하고 구체적인 부피와 스케일을 지정하는 행위다. 캐릭터의 이미지를 작은 부피로 압착하고 압축한다. 피규어는 작은 크기 안으로 캐릭터라는 추상관념을 응축한 고밀도의 사물이 된다. 밀도가 높은 사물에는 강한 중력과 인력이 작용한다. 미니어처가 블랙홀과 같다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피규어가 관념과 물리적 입체조건을 응축하고 있기에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피규어를 향하게 된다.

대표적인 피규어 제작사인 반다이의 프리미엄 반다이 웹 한정 드래곤볼 HG 야무치 를 살펴보자. 토리야마 아키라의 만화 드래곤볼 (1984)에 나오는 ‘야무치’가 적과의 전투 중에 예상치 못한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을 기반으로 제작된 피규어다. 손바닥 위에 올릴 수 있는 작은 크기로 매우 섬세한 조형이 눈에 띈다. 이 피규어의 주목할 만한 특징은 제품의 광고 이미지에도 드러나 있다. 죽어있는 캐릭터의 조형은 생활공간 어디에다 배치해도 그 풍경 속에 녹아든다. 단순히 어울리기만 한 것이 아니다. 평범한 장소를 집중하게 만드는 기준점이자 다른 시간을 흐르게 하는 장치의 역할을 한다. 평범한 책상 위, 거실의 장판, 의자의 모퉁이가 한 캐릭터의 죽음의 장소로 변모한다. 이 작은 사물은 단순히 캐릭터의 서사를 기억하게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마치 음악처럼 공간의 분위기를 전환하는 기폭제가 된다.

야무치 피규어와 광고 이미지(Bandai)

  1. ‘피규어’는 올바른 표기가 아니다. 영어단어 figure의 올바른 한국어식 표기는 ‘피겨’다. 빙상 스포츠 ‘피겨’와 동음이의어다. 하지만 주요 피규어 생산지인 일본의 독음인 휘규아(フィギュア)가 사용되고 쓰임이 굳어지면서 캐릭터, 모형 상품을 부르는 고유명사로 ‘피규어’라 쓰이고 있다. ‘캐라’의 사용과 유사한 독자적인 발음법은 피규어가 지닌 독특한 성질을 대변한다. 

  2.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はれ,もののあわれ,物の哀れ)란 일본 헤이안 시대의 왕조문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문학적 미적 개념, 미의식의 하나이다. 직역 또는 의역하여 사물의 슬픔, 비애의 정등의 의미를 갖는다. 보고 듣고 만지는 사물에 의해 촉발되는 정서와 애수, 일상과 유리된 사물 및 사상과 접했을 때, 마음의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적막하고 쓸쓸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슬픈 감정등을 말한다. 

  3. Sawaragi Noi. (1998). “日本·現代·美術”. 김정복 역(2012). 『일본. 현대. 미술』. 두성북스, 204pp 

  4. 가츠시카 호쿠사이(일본어: 葛飾 北斎, かつしか ほくさい, 1760. 10. 31 ~ 1849. 5. 10). (1832). “神奈川沖浪裏 かながわおきなみうら”. 호쿠사이가 제작한 목판화. 1831년 무렵에 간행된 우키요에 연작 ‘후가쿠 36경’ 중 하나로, 거대한 파도와 배, 배경에 후지산이 그려져있다.  

  5. 이어령. (2008). 축소 지향의 일본인, 문학사상사, 116pp. 

  6. 건담 프라모델의 약칭(ガンプラ).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에 등장하는 로봇을 소재로 한 플라스틱 축소 모형을 말한다.  

  7. 개라지 킷(Garage kit)이나 아마추어나 소규모 업체에서 생산하는 모형에서 많이 쓰이는 재료. 무발포 폴리우레탄 수지를 말한다. 모형에서 쓰이는 것은 주로 2액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