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 Sunpil

피규어 TEXT_004

돈선필
2016-04-24

4.

대화를 하다 보면 상대방에 대한 이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게 된다. 오가는 언어는 마치 물체 같아서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하는 시험지 같다. 언어에 의지해 오가는 대화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호한 형태는 분명히 있다. 언어는 음성이나 문자 같은 다양한 매체를 거쳐 구체적인 형상이 생긴다. 때로는 파장이 되기도 하고 잉크의 흔적이 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언어에 기대고 있던 감정이나 감각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몸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해나 오해도 함께 태어난다. 대화한다는 건 상대방과 직접적인 교집합을 만드는 과정이라기보다는, 대리인을 통해 전달받는 파편적인 단편 소설 같다.

4.1.

지금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아주 자연스러운 시대다. 대형 할인점에 진열된 각종 상품이 정렬된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경이롭다. 지금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장소를 둘러보자. 잡다한 살림살이부터 각종 전자 디바이스, 책과 가구, 전기기구와 냉난방 장치까지 인공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물건이 거의 없다. 공산품과 레디메이드, 대량의 복제 상품이 삶의 일부가 되어 집안 곳곳에 태연하게 자리 잡고 있다. 대량 생산을 위한 효율적인 시스템과 공정은 상품의 가격 하락과 효율적인 소비 생활을 돕는다. 저가의 공산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고가의 공정 시스템이 필요하다. 대량 생산은 반복의 연속이다. 모던 타임스(1936)에서 돌고 도는 톱니바퀴와 컨베이어 벨트의 움직임을 따라 일어나는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같은 동작이 무한으로 반복되는 시스템이 바로 생산 공정이다.

공정이란 것은 정교한 기술과 고액의 자본을 투입한 금형들의 조합과 조화의 풍경이다. 셀 수 없는 반복 과정 속에서 정교한 형태를 온전히 유지해야 하는 것이 금형의 역할이다. 고가의 생산공정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제작비에 상응하는 상품에 대한 수요가 없다면 탄생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인과관계는 마치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어떤 관념이나 감정이나 상황을 말하기 위한 욕구와 다수의 수요가 있을 때야 비로소 새로운 언어가 탄생하듯이, 사물의 탄생도 필요성이 전제되었을 때에 발생한다. 반대로 사라져 버릴 때도 있다. 언어가 사회의 합일 과정에서 사용과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면 도태되어 사라진다. 사물도 이와 마찬가지다. 아무도 원하지 않고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사물이 온전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오늘날 어떤 사물이 물리적인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것은 대외적이거나 암묵적인 의사합일 과정이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에 현존하는 사물들은 우리의 대화가 생활 속에서 구현된 조각에 가깝다.

4.2.

예전에는 언어나 기호가 도구와 같다고 생각했지만, 되돌아보니 사물과 도구들이 언어에 가까웠다. 그것들은 자의적으로 정하거나 새롭게 제작한 것도 아니다. 원래부터 그곳에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언어는 태초부터 있었던 것 같을 때도 있지만, 사실 인류의 시간과 동기화하며 발전해왔다. 고대어와 현대어를 비교해보면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명료성과 효율성이 눈부시게 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사물도 인공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역사와 함께한다. 인류의 역사는 도구의 역사나 마찬가지다. 언어가 시간을 흡수하며, 소멸하고, 발전하고, 세분하듯이 사물도 변모해왔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와 태도도 시간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낯선 물체를 인식하는 과정은 아직 습득하지 못한 외국어의 의미와 용법을 알아가는 시간과 유사하다. 때로는 언어의 장벽에 한계를 느끼고 배우는 과정에서 포기하게 되는 외국어처럼, 어떤 물건의 사용법과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해도 도무지 알 수 없을 때도 있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정의하기를 좋아한다. 성서에 등장하는 아담이 태초에 탄생한 모든 피조물에 이름을 붙여주는 일화처럼, 우리는 사물의 이름을 정하고 목적을 설정하고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공유한다. 약속한 형태가 있고 합의한 사용법이 있다. 이런 과정 덕분에 사물은 언어와 더욱 닮아간다. 그렇다면 언어를 닮아가는 수많은 물체에 둘러싸여 생활하는 우리는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는 다국적 도시에 거주하는 것과 같다. 영어처럼 세계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만국 공용어가 있듯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쯤은 소유하고 쉽게 사용하는 도구가 있다. 보통 이런 도구들은 생존조건, 일상생활을 위한 보조기구들이다. 주방의 취사도구부터, 세탁을 위한 기계들, 잠을 자기 위한 침구들은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익숙한 사물들은 쓰임새도 분명하고 목적도 정확하다. 이와 반대로 소수의 사람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사물이 있다면 그것은 국지적인 언어와 같다. 소수민족이 사용하는 특수한 언어처럼, 일반성을 벗어나는 물체는 그 자체의 쓰임도 독특하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매우 낯설고 존재 자체가 의문스러운 물건일 수도 있다.

4.3.

최근 피규어는 과거보다 전문적인 수집가와 피규어에 관심을 보이는 일반인이 늘어나는 추세지만, 수치상의 범주만 변화했을 뿐 여전히 마이너한 장르다. 비슷해 보이는 피규어를 세세하게 분류해 낼 수 있는 사람은 분명 많지 않다. 피규어라는 사물 자체가 보편성에서 조금 벗어나 있기에 물체의 고유한 형태 언어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이해는 더욱 힘들어진다. 일반인이 전문적인 화학 공식으로 작성된 논문을 독해하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거기에 사용되는 문자의 모양 자체를 구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낯설음’이 ‘익숙함’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시간이 있어야 한다. 언어를 배우려면 반복적인 학습이 필요하듯이 물체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형태와 색감을 익히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새로운 물체에 대해 깊이 있게 알기 위해서는 꾸준하게 마주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종종 3호선 남부터미널역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국제전자센터에 방문하곤 한다. 국내에서 다양한 피규어의 실물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장소다. 모니터의 이미지와 실제 사물은 다른 해상도를 지닌다. 누군가에겐 실체가 갖고 있는 고유한 힘을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종교적이고 경건한 장소일지도 모른다. 오타쿠들의 성지인 일본 아키하바라의 라디오회관이 게임, 망가, 애니메이션, 프라모델같은 서브컬처의 랜드마크라면, 국내에서는 국제전자센터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랜드마크라던가, 서브컬처의 메카라고 불리기에는 몹시 취약한 풍경을 자랑한다. 90년대에 경험했던 국내 서브컬처 중심지들의 모습은 21세기가 15년이나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활발함이 전혀 없는 전자상가 속에 있다거나, 늘지도 줄지도 않는 매장의 수, 인테리어의 유행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부조화스러운 구조물과 조금 침침한 실내 전경, 심지어 그곳에 방문하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온도를 유지하는 독특한 장소다.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어 매니악한 사람의 수가 적은 탓인지, 한국의 지리적 위치가 일본과 지나치게 가까운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독자적인 서브컬처가 자리 잡기는 여러모로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기에 피규어를 대면하기 위한 물리적인 장소는 아주 빈약한 것이 현실이다.

국내에서 피규어라는 물체에 대한 정보와 경험은 아키바의 거리 같은 생생한 현장이 아니라, 모니터의 건조한 화면 속이 더욱 풍부하다. 국내의 수집가에게 피규어의 언어를 체화할 수 있는 시간은 구매를 결정하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다. 그래서 수집가들은 언제나 택배를 간절하게 기다린다. 이미지가 물체가 되어 다가오기를 소망한다. 사물화는 인내의 시간을 동반한다. 피규어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차에 익숙해져야만 하는 것이 이곳에서 생활하는 수집가들의 숙명이다. 아마 일본에서 태어나 오타쿠의 길을 걸었다면 피규어라는 대상은 몸에 각인 되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마치 모국어처럼. 아키바의 거리에서 원더페스티벌이나 타마시네이션같은 대형 행사장에서 눈앞의 사물에 대해 집중하는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국내의 빈약한 피규어 환경에서 발생하는 시차와 거리감은 사물화 속으로 쉽게 스며들지 못하게 방해할지 모른다.

분명 일본의 ‘사물화’ 적인 접근방식이 우리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다른 장소의 정서이자 관념 언어다. 그러나 70년대 이후로 이곳에서 출생한 사람들은 20세기 말부터 변형되어 유입된 일본의 문화와 콘텐츠에 의해 물화적인 추상법을 유사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체화해왔다. 캐라를 성립할 수 있게 하는 ‘번역된 사물화’의 형식들을 보고 이해하고 즐기는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습득한 ‘사물화’의 감각은 뒤늦게 생긴 버릇, 익숙해져 가는 외국어 같다. 그것들이 서서히 몸속에 스미는 언어가 되고 사고가 되고 삶의 태도가 되어 나타난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마주하는 빈약하고 부실하고 변하지 않는 어수룩함은 그 자체가 완벽한 조건이다. 이곳에서 피규어를 대면하는 것은 전선과 전파를 타고 모니터와 스마트폰의 평면을 품은 무게 없는 현실을 가늠하는 목적 없는 행동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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