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 Sunpil

特撮의 餘命은 黎明

돈선필
2021-12-27
SSSS.DYNAZENON(2021), 제5회 恋人みたいって、なに? 연인 같다는 게 뭐야?

지난 초여름 미세한 정동情動을 느꼈다. 그 결과 오래된 텔레비전 한 대를 중고거래로 충동 구매하게 된 것이다. 오래된 물건의 값은 예상보다 만만치 않다. 넷플릭스도 바로 연결되는 신형 42인치 TV를 처분하고 남은 돈에다가 비슷한 액수를 더 보태어야 살 수 있는 금액이다. 골동품도 아닌 20년 전 가전제품이 작년에 구입한 것보다 훨씬 더 비싼 황당한 상황이지만 오래된 플레이스테이션을 조금이나마 당시와 근접한 화면으로 구동시켜보고픈 욕심이 동했다. 무엇보다 수년 전부터 쓸모없이 공간을 차지하는 브라운관 TV의 형태에 신경 쓰이는 부분을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소니 트리니트론 13인치. 중고거래를 통해 만난 판매자는 작은 레트로 게임 박물관 같은 원룸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상태가 준수한 트리니트론은 제법 유명한 레트로숍에서 구매한 물건이라며 작은 쪽지처럼 보이는 보증서도 챙겨주었다. 호기심이 동해 판매처를 검색해보니 창덕궁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마련된 근사한 오프라인 상점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시대를 풍미했던 수입산 가전제품들이 정갈히 진열되어 있어 오타쿠보다 상쾌한 인싸의 향기가 날 것 같은 곳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생존경쟁에서 탈락한 가전제품의 납골당은 스산한 기운 하나 없는 21세기의 스타일 리더가 되어있다. 80~90년대의 풍취를 누리고 싶어 하는 젊은 소비층을 겨냥하고 있는 풍경에서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거의 20년째 사회, 문화, 예술 전반에 지속 중인 레트로 붐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노스탤지어에서 유년기 기억을 강제 추출하는 가족 앨범의 단계까지 성큼 다가와 버린 셈이다.

“사람은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때 흡수한 것을 평생 집착한다.”

건담의 아버지 토미노 요시유키의 인터뷰에서 핵심 내용도 아닌 거의 지나가며 이야기하는 한마디가 잊고 있던 정곡을 계속 건드린다. 서기 2000년. 고등학교 진학과 21세기로의 도약이 운 좋게 겹쳤던 시기였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 것만 같은 막연한 기대감은 그전까지 경험해왔던 시간을 완벽히 잊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30대 후반을 접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선택이나 취향의 근간을 되짚어보니 10대 초중반의 경험과 감각이 그 발원지였다는 사실을 문득문득 깨닫는다. 그 중심에는 유년기 시청각 자료들의 흔적이 깊이 배어있다. 텔레비전이 문화와 예술의 전위적 위상을 공고히 다지고 있던 시기에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동네마다 자리하고 있던 비디오 대여점을 기억할 것이다. 컬러 TV와 VHS의 보급으로 시청자는 자신이 원하는 비디오 콘텐츠를 능동적으로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오늘날 스트리밍 서비스의 오프라인 버전이라 할 수 있는 비디오 대여점은 어린이들에게 선망의 공간이었다. 가게 전체를 빼곡히 채운 동일 규격의 비디오 케이스들은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시청각 자료의 방대함을 물리적으로 체감하게 만든다. 어린이 영화부터, TV 애니메이션, OVA까지 다양한 콘텐츠 중에서 최정상 인기를 다투던 장르는 ‘특촬’이라 불리는 애니메이션도 드라마도 아닌 기묘한 영상 작품이었다.

특촬特撮이라는 명칭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영상을 위한 특수촬영特殊撮影 기술이 장르로 정착하게 된 작품이 바로 특촬 시리즈다. 국내에서 유통되었던 ‘최초’의 특촬 작품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한국 특촬사의 가장 영향력을 끼친 작품을 꼽는다면 누구나 지구방위대 후레쉬맨을 이야기하게 된다. 1989년 대영팬더가 일본에서 수입해온 초신성 플래시맨(1986)은 지구방위대 후레쉬맨이란 이름으로 번안되어 당대 아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 시리즈의 구성은 조금 독특한데 애니메이션에나 나올법한 상황과 장면을 소품과 모형을 이용해 실사로 촬영한 것에 배우들이 연기하는 드라마가 더해져 특유의 기묘한 정서를 풍긴다. 허구적 내용이지만 현실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손쉬운 감정이입을 끌어내는 특징 덕분에 쉽사리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셈이다. 단순 유행이라기보다는 사회현상에 가까웠던 지구방위대 후레쉬맨의 인기는 여러 특촬 작품의 유입을 도모하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이 시기쯤 국내에서 생산된 특촬풍의 어린이 드라마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어린이들에게 영향력을 크게 미치는 만큼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에서 제작된 영상물에 대한 반일정서와 아이들이 폭력이 쉽게 노출된다는 학부모들의 고민이 주요 골자였다. 때문에 여러 우회경로를 통해 국내에 유입된다. 직접 일본 제작사의 영상을 공수받기보다는 미국 ‘사반 엔터프라이즈’에 의해 미국식으로 로컬라이징 된 시리즈를 국내로 반입해온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일본에서 미국에서 한국으로 두 차례의 번안을 거쳐 공룡전대 쥬레인저(일)마이티 모핀 파워레인저(미)에서 무적 파워레인저(한)로 소개되었으며 전광초인 그리드맨(일)슈퍼휴먼 사무라이 사이버 스쿼드(미)에서 컴퓨터 특공대(한)로 방영된다. 현재도 대원미디어를 통해 수퍼전대 시리즈와 가면라이더 시리즈는 꾸준한 현지화를 거쳐 어린이들의 시각 문화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작은 브라운관 화면을 통해 관람했던 특촬의 풍경은 할리우드 영화 같은 가공 판타지 세계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잘 만든 장난감과 인형 탈이 움직이는 매력적인 영상물이었다. 어린이의 눈으로 보아도 명백한 가짜의 모습을 태연히 외면하고 연기하는 배우들의 뻔뻔함은 당시 10대의 눈에 ‘쿨’해 보였던 것이다. 마치 무대 위에 케이팝 아이돌의 퍼포먼스가 현실적으로 조금 이상해 보이고 의상과 소품의 정교함이 떨어져도 ‘과몰입의 마법’ 덕분에 누구보다 멋져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화면에서 움직이는 미니어처와 모형은 직접 볼 수 없지만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아이들이 TV쇼에 등장하는 장난감을 소유하기 원하는 이유는 단순히 상업 광고에 현혹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았던 가상과 발 딛고 있는 현실을 연결해줄 수 있는 교두보가 바로 장난감이기 때문이다. 실제 촬영에 사용하는 소품과 비교해서 열화된 가짜라는 표면적 사실보다 그 정형적 상태가 동반하는 안정감. 이 같은 감각을 물질로 공유 할 수 있는 여건이 제공되는 특징은 특촬 작품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특촬이 견인해온 특유의 정서는 재현을 위해 노력한 결과물의 품질이 떨어지면서 발생하는 낙차에서 출발한다. 그 간극을 매끈하게 다듬어 보정하기보다 동시대 기술을 동원해 섬세하게 유지하려는 태도가 ‘특촬스러움’을 가중한다. 결국, 특촬은 재현을 위해 가공한 사물에 드러나는 한계점을 새로운 재현 기술로 보존하는 행위의 연속이며 이는 특수촬영을 많이 사용한 영상과 특촬 작품을 구분 짓는 기준이 된다.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켜켜이 쌓여온 특촬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 갈 것만 같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좀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특촬은 사장되어가고 있는 장르다. 영상 촬영의 효율성이나 스태프의 안전, 제작비용과 기간을 고려해볼 때 특촬의 전통적 촬영방식은 시대착오적인 면만 남아있다. 유서 깊은 특촬 작품 ‘울트라 시리즈’를 탄생시킨 츠부라야 프로덕션은 현재까지도 전통 제작 방식을 고수하고 있지만, 실제 미니어처를 제작하는 수고와 슈트 액터의 노고를 감지하는 날카로운 시각의 시청자와 비평적 시각장은 점차 축소되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팬데믹 이후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의 급부상으로 각종 영상 콘텐츠가 범람하게 된 오늘날. 새로운 세대에게 현실보다 정교한 CGI의 기술이 세계를 진술하는 최적의 도구가 된 이상 가짜임이 명백히 드러나는 슈트와 소품에서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점차 불가능에 가까워지고 있는 셈이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세상은 점차 변화한다.

소니의 트리니트론은 TV 문화에 이바지한 바를 인정받아 1973년 에미상을 수상한 최초의 전자제품이 된다. 그 후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구시대의 산물로 생존경쟁에서 밀려나 생산마저 중지되는 운명을 맞이하지만, 20년 후에는 수집가들의 사랑을 받는 최고급 레트로 기기로 추앙받으며 다사다난의 격동기를 보내고 있다. 두루뭉술한 CRT 화면이 선사하는 흐릿한 이미지는 선명한 LED 스크린이 제공하는 화려한 장면과 병치하며 당대의 해상도와 리얼리티 문화의 순환에 관한 질문을 낳는다. 지난 시대의 기술과 관습은 세상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쓰임새를 바꿔가며 복제와 재복제를 반복해 동시대와 합을 맞춘다. 도태되어 사라지지 않고 항상 새로운 사용법을 찾아 안착하는 과정에서 넘쳐나는 재해석과 오해는 돌고 도는 시간 속에 자연스레 희석된다. 트리니트론과 함께 성장해온 특촬 시리즈도 텔레비전의 시대가 저물어 가면서 서서히 여명餘命을 맞이하고 있지만 가까운 미래에는 지금의 추락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여명黎明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아마 그 순간은 우리가 막연히 상상하거나 기대했던 모습과 많이 엇나가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새롭지도 않을 것이다

뉴스페이퍼 2021 발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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