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 Sunpil

오르후스의 관객에게 돈선필을 소개합니다

유지원
2021-06-20
[출판] LITTLE ASJC X LITTLE KA

오르후스의 관객에게 돈선필을 소개합니다 Introducing Don Sunpil to dear audience in Aarhus

피규어라는 언어적 사물 Figure, a linguistic product
돈선필의 입체 작업은 작가 본인을 포함한 여럿에게 조각이라 하기 어색한 것(not-quite-sculpture) 혹은 사물에 가까운 것으로 취급된다. Cats on Mars에 진열된 조각이 예술전문운송 업체의 손길이 아닌 페덱스의 로지스틱스에 맡겨졌다는 점, 그리고 돈선필의 개인전이 대체로 튜토리얼이나 스토리텔링 역할을 하는 영상과 더불어 생활공간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이 설치된다는 점 또한 이러한 작업의 입지를 반영하는 듯하다. 그 이유는 돈선필이 조형을 인식하는 방식이 피규어라는 사회문화적 현상에 의해 오염되어버렸다는 데 있다.

피규어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 등장하는 2차원 캐릭터를 바탕으로 만든 축소 모형이다. 이때 원본이라 할 수 있는 캐릭터는 실제로 존재할 법한 인물에 대한 사실주의적 묘사가 아니라 극단적인 생략과 선택적인 강조로 만들어진 것이다. 생략과 극단화의 문법은 소비자와 일종의 공모 관계를 요하는데, 머리색이나 안경 착용 여부, 착장(wardrobe)과 같은 단순한 시각적 특징으로 개별성을 획득한 캐릭터를 알아보기로(identify) 약속하는 것이다. 비어 있는 얼굴과의 결탁(collusion)에서 소비자는 각자의 취향과 욕망을 투영하여 빈칸을 채워 넣는다. 그렇다면 캐릭터를 3차원 합성수지 모형으로 만드는 일에는 큰 위험이 따른다. 생략되었던 부분을 물질로 채우고, 과장된 부분을 적절히 다듬는 일은 꽤 예민한(delicate) 작업이기 때문이다. 신체의 비율과 얼굴의 생김새는 약소한 오차에도 일그러지기 일쑤다.

축적된 경험과 고도의 기술을 투입하여 3차원 모형으로 번역된 사물. 그 형태를 즐기는 것(appreciate) 외 다른 용도는 없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피규어는 순수예술로서의 조각과 포개진다. 단, 피규어는 대량생산된 공산품으로, 그 존재는 곧 원작에 대한 인기와 시장의 수요를 드러낸다. 많은 사람의 합의가 뒷받침되어야 하며, 원본 캐릭터와 이를 둘러싼 내러티브를 함의한다는 점에서 이 사물은 일종의 언어(a distinct language)다. 이에 돈선필은 피규어를 정적인 오브제가 아니라 조형 언어(sculptural language), 즉 주어진 세상을 인식하는 주형으로 본다. 어쩌면 그가 동료들과 함께 2017년부터 운영한 미술 공간의 이름인 ‘취미가’ 또한 몇몇의 독특한 취향으로 소급되곤 하는 사물 군집을 사회의 단면을 투시할 수 있는 매체로 보는 그의 관점이 반영된 것일 수 있겠다. 어떤 물건을 갖고 싶다는 욕망은 개인의 차원에서는 특수한 것이지만 사회를 특정한 방향으로 견인하는 힘이 되곤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무척 야심 찬 이름일 수도 있겠다.

나아가 돈선필의 작업은 근본적으로 파생적일 수밖에 없지만 되려 하나의 차원이 추가되면서 무언가는 붙고 다른 무언가는 누락되면서 결국 출발점으로부터 전혀 다른 지점에 도착하는 피규어의 원리를 우리나라의 근대화 메커니즘과 병치하여 이해한다. 그가 살아가며 이해하도록 강제된 세계는 초고속 근대화 과정을 통과하며 가설된 것으로, 잠정적인 원본 – 따라잡아야 하는 ‘선구적’ 근대화의 모델 – 이 수많은 오작동과 더불어 복제된 것이다.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유입된 일본 문화를 비롯한 윤택한 문화적 환경과 서울 특유의 속도감, 근대화의 찌꺼기에 대한 직간접적인 체험은 피규어라는 조형 언어를 경유하여 윤곽을 드러낸다.

피규어를 놓기 전에 일단 소파를 놓자 Put a sofa before finding a spot for the figure
돈선필은 피규어라는 언어적 사물을 감상을 위한 진공 환경에 속박하기보다 일상적이면서(mundane) 내밀한(private) 환경에 심어 두어(plant) 시간과 공간에 대한 고전적인 질문에 반응한다. 첫 개인전 민메이어택: 리-리-캐스트(시청각, 2016)에서는 원본이 수차례 복제되는 가운데 일어나는 오류와 소실에 주목함으로써 그가 살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질문했다. (이에 대한 잠정적인 답은 ‘열화 복제된(degraded in repetition) 도시 서울’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굵직한 사건들이 일종의 밈으로 용해된(melted) 합성수지는 한옥을 정비해 만든 전시 공간에 일상적인 가구 및 집기와 더불어 잔뜩 들어차 있었다.

그다음 개인전 METAL EXP: 외톨이의 움직이는 시간(취미가, 2018)에서는 롤플레잉 게임 드래곤퀘스트 속 하구레 메탈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시간의 형태를 탐구했다. 다량의 경험치를 제공하여 신속한 레벨업을 가능하게 하는 하구레 메탈은 운이 좋아야만 만날 수 있다. 때문에 귀여운 은빛 슬라임의 형태는 곧 가속을 뜻하는 기호가 된다. 이때도 역시 적당히 따뜻하고 어두운 조명, 천천히 공간을 누비는 로봇청소기, 표구한 포스터, 콘솔과 소파 등이 배치되어 누군가의 집에 방문한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외에 그가 참여했던 전시에 뜻밖의 예외는 없다. 언제나 앉을 곳이 마련되어 있고, 관객을 단숨에 압도하기보다 구석구석 구경하는 재미를 선사하며, 소곤소곤 대화를 하기에 적절하다.

이처럼 돈선필은 잔잔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환경과 평소의 생각을 풀어놓는 듯한 영상 사이에 피규어 조형을 끼워 넣어 관념이 구체적인 몸을 얻고, 형태가 모종의 질서 속에서 언어로 활성화될 수 있도록 한다. 그 가운데 선험적으로 주어져 우리의 경험을 조직한다고 여겨지는 시간과 공간이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성형된 경위를 한 겹씩 살펴보는 것이다.

상자는 이동한다 Boxes travel – it’s what they do
시공간에 대한 돈선필의 질문은 Adventure (5) Times에서 이동(mobility)에 대한 탐구로 나아간다. 팬데믹이 전세계에 흑막을 씌워버리기 전, 돈선필은 매년 몇 차례씩 일본을 방문했고 딱히 좋지만은 않다고 하면서도 ‘원더 페스티벌’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매년 여름과 겨울 일본 치바현에서 열리는 동인 행사인 원더 페스티벌은 단순히 말하자면 일본의 대표적인 피규어 페어다. 원더 페스티벌에 수차례 방문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쓴 피규어 TEXT: 원더 페스티벌 리포트(2019)의 서문에서 돈선필은 페스티벌이 열리는 날 아침, 마쿠하리 멧세(Makuhari Messe)로 가는 순례길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긴장과 기대로 충만한 열차, 모두가 프로토콜을 익히 알고 있다는 듯 질서정연한 대기 줄, 그리고 드디어, 감동적인 입성. 저자는 피규어 자체보다 그것을 만나러 가는 길에 우선 주목한다.

Adventure (5) Times의 화자는 한정판 피규어 출시 소식에 충동적으로 일본에 간다. 바로 그 피규어를 손에 넣기 위한 무척 직설적인 여정은 신속하게 좌절되고 만다. 아침에 주섬주섬 일본으로 날아간 타지인은 새벽부터 기다려온 현지인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5시간 만에 공치고 돌아온 화자는 온라인에서 프리미엄을 얹어 그 피규어를 사고야 만다. 택배 상자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오는 길은 화자가 감행했던 짧은 어드벤처와 포개진다. 부지런히 걸어 도착한 상자. 하지만 화자의 언박싱은 수고로운 여정을 감수했던 것과 어울리지 않게 싱겁다(fall flat). 상자를 열어 피규어를 빠르게 요리조리 확인하면 끝이다. 그 사이 고양이가 빈 상자를 차지한다. 내용물이 아니라 여행하는 컨테이너를 선호하는 고양이는 마치 물욕의 핵심을 알고 있는 현자와 같다. 특정 사물을 가지고 싶은 욕망은 그것이 손에 들어온 순간 말끔하게 증발한다. 물욕의 무덤인 소유의 헛헛함을 보상하는 것은 결국 그 여정이다.

Adventure (5) Times의 화자가 감행한 즉흥적인 여정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호사로운 것이 되어버렸다. 비행기는 바이러스의 숙주가 되어버린 인간 대신 물건을 실어 나른다. 사족보행 택배상자는 욕망의 대상이 되는 사물을 소거하고, 오히려 그것을 담기 위해 쓰이는 규격화된 용기를 스스로 걷는 행위자(agent)로 형상화 한다. 관절 표현과 기지개를 펴거나 주저앉는 자세가 흡사 사족보행 동물, 특히 고양이를 닮아 내적 친밀감을 높인다. 게다가 단색의 레진으로 제작되어 피규어의 어법을 상기한다. 이와 더불어 덴마크로 건너간 조각들은 아크릴 박스로 고정되어 있어, 완충재에 기대어 박스에 패킹되어 있던 상태가 연장된다. 미처 언박싱을 완료하지 못한 상태에 끼어 있는 사물은 한 인물의 무모한 일본 원정기와 더불어 그가 겪은, 그리고 앞으로 감행할 이동의 스펙트럼을 풀어놓을(unpack) 것이다.

작업을 만든 돈선필이나 아트선재센터의 관계자, 그리고 여러분에게 돈선필을 소개하는 나 중 그 누구도 덴마크로 날아가 Cats on Mars를 직접 보지 못할 것이다. Adventure (5) Times에 실린 나의 목소리가 근시일 내 방문하지 못할 공간에 울리고 있을 것을 상상하면 괜히 간질간질하다. 하지만 포스트코로나 시대가 우리에게 준 가르침이 있다면, 그것은 미술이 근본적으로는 사물의 이동이라는 점이다. 다종다양한 사물은 적절한 용기에 담겨 한 장소에 도착하고, 적절한 곳에 일정 시간 동안 배치되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거나 전혀 다른 곳으로 출발할 것이다. 사물의 이동과 배치는 인간-관객과 담론에 선행하는 조건이다. 그렇다면 사물이 관객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오히려 사물의 정교한 이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서울에 사는 나는 조만간 리틀 쿤스트할오르후스를 들를 예정이다. 성실한 걸음으로 먼 길을 온 사물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서울에서 기획자, 비평가, 통번역가로 활동한다. 관심 경제와 플랫폼 자본주의의 교차점에 놓인 노동, 대중미디어 및 시각문화에서의 젠더 재현, 큐레토리얼에 대한 물질주의적 접근을 중심으로 실천을 이어왔다. 유어서치, 내 손 안의 리서치 서비스(공동기획, 2018, 두산갤러리 서울), (Not) Your Typical Narcissist(2019-, http://notyourtypicalnarcissist.com/), 그래비티 샤워(2020-2021, 대한극장, 갤러리 N/A) 등을 기획했다. 옐로우 펜 클럽과 시각문화학회의 창립 멤버이며, 현재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재직 중이다.

Jiwon Yu is a curator and writer, translator/interpreter based in Seoul. Yu’s practice explores the notion of labor at the intersection of attention economy and platform capitalism, gender representation in popular media and visual culture, and the materialist approach to the curatorial. Yu curated Your Search: On-demand Research Service (co-curated, 2018, DOOSAN Gallery Seoul), (Not) Your Typical Narcissist (2019-, http://notyourtypicalnarcissist.com/) and Gravity Shower (2020-2021, Daehan Theatre, Gallery N/A, Seoul) among others. Yu is also a founding member of Yellow Pen Club (2017-) and Society of Visual Cultures (2018-). Currently, Yu is an assistant curator at the 11th Seoul Mediacity Biennale (2019-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