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 Sunpil

신세계에는 새로운 신을

돈선필
2022-12-19
Portrait Fist no.02, ABS, resin, acrylic, figure, Polyurethane Foam, 550x400x450mm(HxWxD), 2020

1999년 겨울. 세기가 뒤바뀌는 극적 전환점을 앞두고 있던 중학생 시절. 철없는 10대의 부푼 기대감과 달리 세상은 큰 동요 없이 잔잔하게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밀레니엄 버그가 만들어내는 대혼란도 없고 미지의 은하에서 침공해오는 외계인도 없고 지구를 관통하는 거대한 소행성도 없고 사도가 각성하는 세컨드 임팩트도 없다.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강한 인상을 느꼈던 순간이 언제였던가. 살아 움직이는 것은 같은 CGI 공룡 영화를 보았을 때? 사이버 여전사가 ‘바꿔’를 외칠 때? 프랑크푸르트에서 독일인들이 딱지치기 삼매경에 빠져있을 때? 기억을 아무리 역재생해 보아도 충격적 자극보다는 소소한 일상에서 마주하는 작은 변화뿐이다. 이쯤 되니 영화처럼 하루아침에 온 세계가 뒤바뀌는 극적 변화가 실존하는지 의문스럽기만 하다. 어쩌면 천지가 개벽하는 변화란 시적허용에 가까운 것 같다. 오히려 스마트폰 보급으로 개체수가 늘어나는 거북목 인간이나 서서히 자취를 감추는 빙하, 장마철 누수인 양 새어 나오는 방사능 오염수처럼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는 조금씩 변해 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았을 때 자신이 기억하던 풍경과 어긋나는 지점을 뒤늦게 깨닫는 것이 우리의 운명 같다.

2017년 봄. 우연히 모니터 너머로 마주친 장면에서 미래의 모습을 보았다. 유튜버라 불리는 동영상 업로더가 새로운 직업군으로 사회적 합의가 생겨날 즈음, 사람이 아닌 일본식 미소녀 캐릭터가 새하얀 배경에서 뭔가를 웅얼거리고 있는 동영상이었다. 그는 자신을 ‘버츄얼 유튜버’라 지칭하며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은 ai라 자신을 소개했다. 누가 봐도 적지 않은 자본을 들여 기획하고 노련한 성우가 더빙하여 편집 과정을 거친 화면에서 상업적 의도를 다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폰의 음성인식 프로그램 시리(Siri)를 선배님이라 부르는 극강의 컨셉충 같은 면모와 기습적으로 튀어나오는 버그인지 의도인지 알 수 없는 기괴한 행동, 잔잔하게 당근과 채찍을 뒤섞는 말솜씨에 시선을 강탈당했다. 당시 다양한 유튜버들이 인기를 얻고 있는 시기였지만, 유튜브 콘텐츠 특유의 정제되지 않은 편집 방식과 리얼한 인간의 얼굴이 피로감을 느끼게 했다. 이에 반해 버츄얼 유튜버라 불리는 이차원 캐릭터의 모습이 제공하는 명백한 가짜의 뻔뻔함은 모종의 안도감을 제공했다. 과도한 영상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나쁘지 않은 안식처가 되었던 것이다. 정기적으로 동영상을 업로드하고 라이브 방송과 음악 앨범도 공개하는 이 가상 미소녀의 정체는 바로 키즈나 아이(キズナアイ). 2016년 12월부터 활동을 시작해 통칭 업계 1위라는 명예와 다사다난한 사건을 거치며 2022년 2월에 화려한 굿바이 라이브 무대를 마지막으로 약 6년간 그 누구보다 왕성한 활동을 이어왔던 유튜버다. 키즈나 아이 이후 가상의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워 동영상을 업로드하거나 실시간 스트리밍 방송을 진행하는 이를 버츄얼 유튜버, 버튜버, VTuber 등으로 명명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차원의 가짜 미소녀가 유튜브 세상에 등장한 순간은 인터넷 세상의 변곡점이 시작된 셈이다.

키즈나 아이를 통해 보았던 미래는 미소녀 같은 납작한 얼굴에서 출발한다. 일본발 서브컬처의 캐릭터 조형 언어는 동시대 현대 사회에 자연스레 안착하여 우리의 삶과 공존 중이다. 각종 미디어 콘텐츠 속에서 미소녀가 꿈틀거리고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2차원 인물들. 그런데 이들의 외형은 사람을 묘사하거나 재현했다기보다는 사회적 합의를 거친 기호의 집합체에 더 가깝다. 지나치게 크고 초롱초롱한 눈에 비해 극도로 간소하게 묘사하는 코와 입은 인간이 가진 얼굴의 고유성을 철저히 압착하여 단순한 도상으로 전환한다. 실제 인간과 달리 얼굴에서 파악할 수 있는 정보 값이 현저히 낮아지니 캐릭터의 정체성은 얼굴 주변부로 확장한다. 다채로운 색상의 머릿결과 범상치 않은 헤어스타일은 모자나 가발에 더 가까워 보이고 미소녀가 애용하는 의상도 특정 컬러와 디자인을 유지하며 자신만의 특질을 더욱 공고히 만든다. 동물 귀, 키치한 액세서리, 의문스러운 꼬리, 약간 시대착오적인 드레스 등 미소녀는 화장 대신 자신의 신체를 화사하게 치장한다. 같은 연장선에서 버튜버들의 현실감이 결여된 외형도 자신의 캐릭터를 각인시키기 위한 합리적 수단인 셈이다. 결국 이러한 특징은 얼굴이 도상과 같은 상태로 비어있는 버튜버의 생태를 대변한다. 버튜버나 유튜버나 실제 사람이 영상 콘텐츠를 견인한다는 절대적 사실은 변함이 없으나 버튜버는 미소녀라는 이름의 새로운 몸을 얻어 현실 세계의 벗어나기 힘든 제약에서 자유를 만끽 중이다.

2022년 봄. 스위스 제네바 대학에서 눈에 띄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Becoming a Virtual Cutie: Digital Cross-Dressing in Japan’(Liudmila Bredikhina)이라는 범상치 않은 제목의 논문은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역할극이 사회의 젠더 규범에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분석한다. 이 논문의 주인공은 미소녀의 탈을 쓰고 활동하는 남성 버튜버들이다. 이들은 자신을 ‘바비니쿠’라 부르는데 일본어 ‘バ〡チャル美少女受肉’의 약자로 ‘버츄얼 미소녀 화신’ 정도로 의역할 수 있다. 이들에게 미소녀 그래픽의 뒷면에 존재하는 실제 인물의 성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일본의 장기 불황처럼 쉽게 변하지 않는 남성성의 규범과 성역할은 바비니쿠에게 트리거가 된 셈이다. 이들은 온라인에 접속하여 가공 미소녀의 모습으로 변신하고 절대불변의 젠더 규범에 도전하는 마법 소녀들 같다. 바비니쿠뿐 아니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늘어가는 버튜버의 숫자를 보고 있으면 SNS의 프로필 이미지가 그 사람을 대변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버튜버는 미소녀라는 고도의 기호를 앞에 세워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고 종속될 수밖에 없었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이들이 ‘카와이’ 한 모습으로 펼치고 있는 온라인 캠페인 같다.

2022년 가을. 키즈나 아이가 쏘아 올린 버츄얼 유튜버라는 작은 공은 잔잔한 파장에서 미소녀라 불리는 거대한 쓰나미가 되어 온라인 세상을 휩쓸고 있다. 유튜브의 후원 시스템인 슈퍼챗 상위권은 이차원 미소녀들이 잠식 중이고 온라인 게임 VRChat에는 오늘도 새로운 네코미미 미소녀로 변신을 앙망하는 아저씨들이 한가득하다. 이처럼 승승장구를 이어가며 새로운 시대를 개막한 것만 같은 버튜버의 세상에도 한계점은 존재한다. 이들은 현실 속에서 우리와 같은 시간을 소비한다는 사실이다. 버츄얼 유튜버 콘텐츠의 경향이 비용을 많이 소모하는 기획 영상물에서 합리적이고 저렴한 실시간 스트리밍 방송으로 변모하기 시작하면서 모니터 속 화면에 종속된 이차원 캐릭터가 아닌 같은 시공을 살아가는 인격체가 된 것이다. 장시간 각본 없는 라이브 방송을 지속하는 버츄얼 유튜버들은 초창기 자신의 캐릭터에 부여한 여러 설정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인기 버튜버 ‘호쇼 마린’은 ‘17세, 마린 해적단의 선장’이라는 컨셉으로 데뷔한다. 하지만, 방송을 거듭하면서 마린 선장을 연기하는 성우의 관록이 묻어나는 경험담과 생활사, 3D 모션에 드러나는 유연하지 못한 관절의 가동 범위에서 30대 초중반의 연령임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최근에는 숨길 의지도 희박해 보이기도 하고 이런 간극이 마린 선장의 영업 포인트로 전환되어 컨셉 유지의 필요성마저 사라졌다. 이렇게 현실과 버튜버가 동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갭모에나 인간미를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그 소실점에는 버츄얼이 사라진 체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는 스트리머의 모습만 남은 불안한 미래를 그리게 한다. 대혼돈의 버튜버 시대가 저물어가는 지금, 버튜버의 시조 키즈나 아이는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의미심장한 문구를 남기고 휴면 상태에 빠져있다. 자본주의의 호명을 받아 언젠가 화려한 모습으로 돌아오리라는 소박한 믿음과 함께 다시 보게 될 그의 모습은 앙증맞은 미소녀 ai가 아니라 모든 이 위에 군림하는 스카이넷의 화신이 되어 신세계를 이끌어 가길 기도한다.


뉴스페이퍼는 50여 명의 참여자가 기고한 글과 이미지를 ‘신문’으로 발간하는 프로젝트입니다. 2022년 뉴스페이퍼 제3호 참여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신세계’를 그려 봅니다. 2022년 현재는 상징적 인물들의 죽음과 함께 저물어 가는 한 시대로 기억될까요? 팬데믹 종식을 기대하며 다시 치솟은 전염률,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기후 위기, 전쟁과 장기적인 경기 침체는 끊임없는 우울과 무력함만을 회전시킬까요? 오늘 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신세계’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 않을까요? 당신의 신세계는 어떤 모습인가요. 뉴스페이퍼 3호에 실린 사소하고 거창한, 현실적이고 터무니없는 다양한 신세계를 확인해보세요. 신세계를 말하는, 흩어지는 가운데 선명한 글과 이미지가 많은 사람의 눈과 손끝에 닿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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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ㅣ2022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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