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 Sunpil

피규어 TEXT_003

돈선필
2016-04-17

3.

일반적으로 망가와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은 2D를 바탕으로 제작된다. 평면이라는 가상의 분할된 공간에서 캐릭터의 역할이 정해지고 이야기가 덧입혀진다. 피규어는 3차원의 조형을 요구하는 매체다. 캐릭터의 이미지는 원형 제작자에 의해 실제의 물질로 환원된다. 2D 캐릭터에서 3D의 물체로 자연스럽게 번역해내는 기술이 피규어 제작의 핵심이다. 애초에 캐릭터는 기호에 가까워서 현실의 3차원에 부합하는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 특히 일본 ‘캐라’의 얼굴은 기호만 떠 있는 비어있는 그릇에 가까운 상태다. ‘캐라’의 얼굴은 종이와 모니터 같은 평면의 상태에서 감상한다면 큰 어색함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입체화를 하게 될 경우 그 자체가 불가능할 때도 있다. 2차원 ‘캐라’의 얼굴은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의 판화처럼 평면에서만 다룰 수 있는 조건으로 구성된 이상형에 가깝기 때문이다.

어떤 각도에서 봐도 자연스러운 3차원 ‘캐라’의 얼굴을 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상상해보자. 망가와 애니메이션의 ‘캐라’는 2차원 평면이라는 백지에서 시작하는 작업이다. ‘캐라’가 화면이나 지면상에서 보이는 시점과 방향은 창작자에 의해 결정되고 그 갈래는 한정되어 있다. 2차원에서는 작화 상에서 어색함이 없는 카메라의 위치만 고려하여 제작하면 된다. 캐릭터의 정면 모습과 옆모습은 분할된 장면 안에서 별개로 존재한다. 정면과 측면이 다른 방식으로 설계되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컷과 컷 사이, 화면과 화면 사이에는 공간을 분할하는 틈과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캐릭터의 옆모습에서 정면의 얼굴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움은 고려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어떤 시선 어떤 각도에서도 형태감이 사실적이고 각 부분의 연결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360도 전방위로 캐릭터 피규어를 돌려보았을 때 완벽한 형상이 구현되어있어야 한다. 뒷면이 텅 비어있는 무대 장치처럼 눈앞에 보이는 단편의 부분만을 잘 재현하고 끝낼 수 없다. 피규어 제작은 존재하지 않았던 허수의 값을 실존하는 물질로 구현해야 하는 매우 난해한 작업이다. 이것은 캐릭터라는 도상이 그려내는 이미지와 실제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부분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고도의 속임수라 할 수 있다. 피규어가 익숙하면서도 매우 낯선 양가적인 사물일 수밖에 없는 것도 정교하게 접목한 허상과 실제를 봉합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형태’는 피규어라는 장르의 핵심이 된다. 피규어의 형태를 결정하는 방법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가짜-재현법’과 ‘의존-변형법’이 있다. 이 두 가지는 피규어의 모습을 결정하는 선택의 기로다.

3.1.

대표적인 피규어 제작사인 알터(ALTER)에서 생산한 에반게리온 신 극장판 : Q - 아스카 저지 Ver.은 발표와 동시에 수집가들 사이에서 크게 화자가 되었던 피규어다. “믿음과 신뢰의 알터”라는 제작사에 대한 수식어는 이 피규어가 얼마나 높은 퀄리티로 제작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극장판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 Qヱヴァンゲリヲン新劇場版: Q(2012)의 등장인물인 ‘시키나미 아스카 랑그레이’를 모델로 했다. 알터에서 제작한 아스카 피규어는 원작 캐릭터의 츤데레1적 성향을 함축하는 찡그린 미간과 짜증 섞인 표정이 완벽하게 재현되어 있다. 단순히 외형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원작 ‘캐라’의 모습과 성격에 밀착한 재현을 보여준다. ‘캐라’를 상징하는 흩날리는 머리카락의 역동적인 조형과 체형을 따라 빛을 반사하는 플러그 슈트의 비닐 질감은 피규어의 완성도를 더욱 높인다. 평면 속 아스카의 이미지는 완벽한 입체로 전환되어있다. 수집가들은 이 피규어와 아스카라는 캐릭터의 동일성에 감탄하며 완성도를 찬양한다. 높은 퀄리티와 완성도는 높은 재현성을 지향하고 있다.

아스카 (안노 히데야키, 2012, 에반게리온Q)
아스카 피규어(Alter, 2015)

우리는 두 개의 대상이 ‘닮았음’을 판단할 때 외형의 조건들을 살피게 된다. 모양이나, 색, 크기 등을 비교하고 차이의 정도를 가늠해서 두 대상의 유사성 유무를 결정한다. 가짜-재현법은 피규어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캐릭터의 모습을 얼마나 정확하게 재현해내는가를 핵심으로 한다. 캐릭터의 모습을 섬세한 조형 기술과 플라스틱 소재의 특징을 활용하여 진짜로 존재하는 3차원의 물체로 만든다. 그런데 이 방식은 왜 ‘가짜’란 단어가 들어갈까. 가짜-재현법은 ‘불가능’을 담보로 하고 있다. 완벽한 재현이 아닌 유사한 재현이다. 그럴싸해 보이는 진짜 같지만 면밀하게 계획된 가짜다. 재현을 위한 원본의 이미지와 재현을 위해 마련된 현실의 질료는 그 시작부터 조화롭지 못한 조합이다. 관념의 캐릭터와 플라스틱을 엮어내는 봉합기술은 그 결과물이 자연스러운 사실인 것처럼 착각할 만큼 정교하다. 극사실주의 회화가 현실의 단면을 완벽히 투사해내더라도 그것은 캔버스와 물감의 조합이다. 눈앞의 현실을 치밀하게 모사하려는 추상화이자 원근법과 명암으로 버무려진 환상이다. 사실처럼 보이지만 사실처럼 보이는 가짜다. 진짜에 한없이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가짜의 흔적이다.

Phat!사(社)의 아이돌 마스터시리즈는 가짜-재현법의 교본 같은 피규어라 할 수 있다. 캐릭터의 일러스트를 기본으로 정말 화면에서 튀어나온 듯한 피규어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보는 순간 캐릭터와 피규어가 매우 닮아있음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원전이 되는 이미지와 천천히 비교해보면 두 대상은 현저히 다른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일러스트 안에서 무시되었던 인체의 비례나 골격, 근육의 관계는 피규어화 과정을 거치며 좀 더 사실에 근접하는 해부학적인 접근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상의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물리적 조건 안에서 스타일을 유지한다. 그뿐만 아니라 납작한 이미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의 ‘뒷모습’이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어느 각도로 돌려봐도 조형적, 해부학적으로 어색한 곳을 찾아내기 힘들다.

가짜-재현법의 대표적 피규어(Phat!, 2015, 미나세 이오리 피규어)

캐릭터에서 피규어로, 2D의 평평한 2개의 x, y축에서 3D의 x, y, z축으로 변화한다. 새로운 z의 조건이 개입되면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그럴싸한 가짜 기술로 조형된다. 캐릭터의 파사드(façade)가 제대로 기능하도록 돕는 뒷면의 형태는 현실의 입체 조건에 맞는 가공의 상태로 축조된다. 가짜-재현법의 피규어는 다른 차원의 이미지가 아니라 눈앞에 있는 사물로 진짜 형태를 갖추고 있는 정교한 가짜다.

3.2.

피규어는 캐릭터의 파생품으로 캐릭터의 재현성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캐릭터와 닮지 않은 피규어는 완성도를 저평가 받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짜-재현법은 캐릭터를 사물로 만드는 왕도(王道)라 할 수 있다. 캐릭터에 가까워질수록 좋은 품질의 상품으로 결정된다. 그렇다면 가짜-재현법만이 유일한 피규어 제작의 길인가? 왕도를 벗어나는 사도(邪道)의 길은 무엇인가? ‘닮았다’는 제법 복잡한 문제다. 우리가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전혀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순간은 이목구비 형태의 동일함보다는 이미지라 불리는 분위기의 유사성과 결부되어 있다. 무엇과 닮았다고 느낄 때는 복사기처럼 표면을 본떠 갈무리한 정보를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하다’는 인상이 어떤 대상과 희미한 연결고리가 생겼을 때 우리는 ‘~같다.’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2014년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애니메이션 KILL la KILL은 과감한 화면 구성과 독특한 타이포그래피 연출이 돋보였던 작품이다. 극의 주요인물인 키류인 사츠키는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의 표상이었다. 애니메이션의 흥행과 더불어 여러 파생상품과 피규어가 제작되었다. 그것 중 하나가 일본의 원형사 사쿠라코 이와나가2키류인 사츠키 센케츠 버전(鬼龍院皐月 鮮血 Ver.) 이다. 2014년 여름 원더 페스티벌3에서 첫 선을 보인 레진 모형이 2015년에 피규어 제작사 굿스마일 컴퍼니에 의해 보급형 피규어로 재생산되었다. 주목할 부분은 사츠키라는 캐릭터에 접근해가는 방식에 있다.

사츠키 (트리거, 2013. kill la kill)
사츠키 피규어 (사쿠라코 이와나가, 2015, 굿스마일 컴퍼니)

이 피규어는 킬라킬의 주인공 사츠키와는 미묘하게 다른 인상을 지니고 있다. 냉정하고 차분한 원작 캐릭터에 비해, 피규어는 비장함을 강조한다. 깊게 파인 미간의 주름과 차가운 표정을 담은 눈매는 실사와 유사하게 조형되었다. 또한 피규어의 표면은 명암의 강한 대비를 주어 평면이 아닌 무거운 물체처럼 그림자 처리가 되어있다. 분명 키류인 사츠키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피규어지만 화면에서 보았던 캐릭터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인물에 가깝다. 가짜-재현법의 아이돌 마스터피규어와는 전혀 다르다. 캐릭터를 재현하지 않고 다른 캐릭터를 옮겨 놓은 것 같다. 원본에 기대어 생산되는 피규어지만, 사츠키피규어는 별개의 존재로 거듭나있다. 의도적인 변형이 가해진 것이다. 그러나 완벽하게 캐릭터에서 벗어나진 않는다. 원전에 의존하는 구조는 지속한다. 그렇지만 완벽한 재현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의존-변형법이다.

일본의 ‘캐라’는 북미의 캐릭터에 비해 유연성이 부족하다. ‘캐라’의 ‘사물화’된 관념은 다른 조건과 환경에 손쉽게 녹아들도록 하지 못하게 한다. 그렇기에 일본의 실사화 영상물의 실패는 정해진 미래였다. 피규어는 관념을 ‘사물화’한 ‘캐라’를 현실의 물체로 만든다. 그러면서 놀랍게도 견고한 사물 같은 ‘캐라’를 추상적이고 유연한 ‘캐릭터’로 변환하게 만드는 열쇠가 된다. 피규어는 ‘캐라’를 북미의 캐릭터처럼 관념으로 환원시킨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물화’된 대상이 현실의 물질이 되면 오히려 추상의 상태로 돌아간다. 피규어라는 2차원에서 3차원으로 오가며 벌어지는 허구와 실재의 봉합술은 ‘변형’을 요구한다. 무게 없는 평면에서 합성수지의 질량을 얻는 변신의 과정이다. 가짜를 둘러싸며 재현을 향해 반드시 달려야 할 필요는 없다.

의존-변형법은 캐릭터를 왜곡한다. 하지만 캐릭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고 최소한의 연결점을 유지하는 의존성이 있다. 완벽하게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지 못한다. 캐릭터와 피규어의 관계는 상보적이다. 의존-변형법의 피규어는 캐릭터에 다가가지 않은 채로 주변을 맴돈다. 캐릭터의 위성처럼 같은 궤도를 기웃거리며 끝없이 자신과 이어져 있는 캐릭터를 지시한다.


  1. 츤데레(ツンデレ)는 2000년경에 등장한 재패니메이션이나 일본의 미소녀 게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등장인물의 인격 유형 가운데 하나를 일컫는 일본어 인터넷 유행어다. 이 말은 ‘새침하고 퉁명스러운 모습’을 나타내는 일본어 의태어인 츤츤(つんつん)과 ‘부끄러워하는 것’을 나타내는 일본어 의태어 데레데레(でれでれ)의 합성어다. 즉, ‘츤데레’의 특징은 처음엔 퉁명스럽고 새침한 모습을 보이지만, 애정을 갖기 시작하면 부끄러워하는 성격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2. 사쿠라코 이와나가 (石長 櫻子, Sakurako Iwanaga) 

  3. 피규어 제작사 카이요도와 굿스마일 컴퍼니가 주최하여 일본 치바현에서 개최되는 피규어/개러지 킷 동인 이벤트. 매년 2회, 여름과 겨울에 개최된다. 약칭으로는 원페스, 원페, WF라 부른다.